당시에는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들에게 나라에서 따로 체류비를 지급하지 않았는데, 대신 그들이 중국에서 사치품들을 사들여와 본국에 팔아 이윤을 남겨 충당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러나 허균은 중국을 오갈 때 도자기나 장신구 같은 사치품을 사지 않고 가진 돈 전부를 책을 사는 데에 썼다. 보다 넓은 세상과 학문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찬 허균은 명에서 돌아올 때 수레에 4천여 권의 장서를 싣고 와서 독서에 탐닉했다. 뛰어난 문장력과 말재주, 방대한 독서량과 암기력을 갖춘 허균은 분명 당대 조선의 천재였다.
허균은 처음 벼슬길에 올라 사형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20여 년간 관직 생활을 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그 사이 허균이 무려 여섯 차례나 파직 당했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에서 벼슬에 오른 사람을 일일이 확이해보지 않는 이상 단언하기 어렵겠지만 한 사람이 여섯 차례 파직을 당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 할 수 있다. 보통 문제를 일으켜서 수차례 파직을 당하게 되면 그 이후로는 관직에 오르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여섯 번의 파직과 세 번의 유배. 이 단순한 기록만으롣 우리는 허균에 대한 두 가지 추측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먼저, 허균의 능력이 출충했을 뿐 아니라 그 능력이 당시 조선에 매우 필요했다는 것이다. 여섯 번의 파직은 뒤집어 여섯 번이나 관직을 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허균은 스물아홉에 첫 번째 파직을 당한 후 불과 한 달이 지나 문과 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된 바 있다. 이미 살펴본 허균의 천재성을 볼때, 그가 시험을 통하여 다시 벼슬을 얻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겠다.
게다가 허균이 관직에 있지 않는 동안 명나라에 사신이 오거나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일이 생기면 조서느이 관료집단은 허균을 다시 찾이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국가의 위신과 체면이 걸린 외교 석상에서 허균만큼 이를 잘 수행할 만한 재목을 찾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벼슬 없이 상대국의 사신을 상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허균은 그때마다 새로운 관직을 받았다.
4천 권의 장서에서 허균 천재설을 찾아보아야 한다. 그에 공들인 노력을 이면을 읽고 본받기 위한 처절한 노력을 해야 한다. 이렇게 따라하다 보면 그 답을 찾을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