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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연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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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장을 입고 내게 왔어그런 모습은 처음이어서 이제 막 결혼식을 마친 남자 같았지그는 꽉 끼는 구두를 신고 배달된 택배처럼 현관에 서 있었어나는 두어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다가 다가가 구두를 벗겨 주었어그리고 그의 다리를 끌어안았지그는 나를 일으켜 세워그대로 방으로 밀고 가 침대에 눕혔어실내복 치마에 얼굴을 묻고 그사이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벗었지그는 푸른빛 도는 검정색 수트와 새하얀 셔츠에 굵은 빗금무늬 넥타이까지 맨 상태였어눈을 감지 마그가 내 귀에 속삭일 때 새 양복의 천 냄새와 사무실의 서류 냄새와 택시 안의 방향제 냄새 같은 것이 났어그는 내가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길 원해나도 그의 얼굴을 보는 게 좋아처음부터 끝까지하지만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 넥타이를 풀어 내 눈을 가렸어넥타이 폭만큼 좁다란 어둠 속에서 그가 움직이자 나는 곧바로 절정에 빠져들었어그건 최고의 쾌락이었어뭐랄까정말 어른이 된 기분모든 비밀을 다 알게 된 기분내가 더할 나위 없이 성숙한 기분이었어그런데 이상하지그와 함께 절망감이 깊어졌어절망감은 우주만큼 커지는 것 같았어그가 넥타이를 걷어 주었을 때 난 울고 있었어그 얼굴한 사람에게 단 하나의 얼굴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그 얼굴이 아니면 쾌락도 비밀도성숙마저도 끝없는 추락일 뿐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어.” 

아름답네.” 

이열이 말했다

수완정말 어른이 되고많은 비밀을 알게 되고완전히 성숙하면우린 어느 정도 절망하게 되는 거야그게 당연한 거야그래서 단 하나의 얼굴을 찾아야 하는지도 모르지.

나는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까지 이열에게 했을까술도 취하지 않은 맨 정신으로이열은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들어주었을까아마도 문을 열어 두자는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때 이열과 난 문을 열어 둔 특수 관계였다우리를 이어 준 것은 서로에 대한 막연한 호감과 삶에 대한 호기심그리고 끊을 수 없는 끌림이었다우린 관대했다손익보다질투나 시시비비보다도덕보다 우선하는 건 아름다움이었다그게 뭐든아름다우면 괜찮았다나머지 일은 별 상관이 없었고 딱히 서로에게 고집을 피우거나 뭔가를 요구하는 사이도 아니었다우린 비스듬히 어긋난 채로 서로에게 문을 열어 두기로 했고알 수 없는 일들을 함께 지나가려 했다


이열을 처음 본 건유 선생의 생일 모임에서였다보쌈집의 길쭉한 방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가장 젊은 남자였다화가들미술 평론가와 교수한복 디자이너보석 디자이너신문기자와 아트 매거진 기자인 나그리고 내분비 내과 의사까지 있었다심지어 그쪽 지역구의 국회의원 비서까지 왔으니 중구난방이었다일 차 생일 파티에 빠진 부스러기 친분을 끌어모은 냄새가 났다나이 든 사람의 생일이란 친분을 다지기 위한 좋은 명분이다나는 마침 그달에 유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내보낸 인연으로 초대를 받았다이열과 나는 대각선 방향으로 마주 앉았는데건배사를 붙인 축하주가 여러 번 돌고 자리가 좀 안정되었을 때 시선이 가끔 부딪쳤다외국어를 쓸 것 같은 인상이었다나는 중국어일본어독일어영어 순으로 가능성을 떠올렸다뭔가 궁리하는 듯한 눈빛과 사탕을 물고 있는 듯 무표정한 입 주변이 이상하게 마음을 끌었다

유 선생은 규모가 큰 갤러리를 한자리에서 오래 운영했고미술 에세이와 미술관 탐방기도 여러 권 낸 유명 인사였다타고난 매력과 친화력과 잘 계산된 영향력 덕분에 오래된 인맥의 동심원 안으로 새로운 사람들이 끊임없이 유입되는 듯했다예순두 살인데도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대로 관능적인 미인이었다유 선생은 관능의 두 요소를 우아함과 청신함이라고 강조했다하지만 그녀의 우아함은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인터뷰이는 아무리 전략적으로 대답해도 결국 자신의 전체를 노출하게 된다단 한 번의 인터뷰였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탐욕과 허영의 수준을 넘어선 부패를 보고 말았다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으면서 그 나이에 그 정도야하며 모르는 척하는 것 같았다사회적 관계란 서로의 허물을 봐주면서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것이다그날 유 선생은 머리를 모아 올리고 가슴이 깊숙이 팬 검정색 실크 드레스를 입고 가슴 위쪽 새하얀 피부와 주름이 늘어진 쇄골 사이에 알이 굵은 흑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드러난 새하얀 귀에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대담하지만 간결하게


좌식은 개인 영역이 불분명한 데다 그날따라 자리 운도 나빠서 양쪽에 앉은 남자가 은근히 무릎을 밀며 침범하고 있었다그즈음에 나는 아는 사람들이든 모르는 사람들이든좌식 방안에 많은 사람과 있으면 초조해지면서 마음이 답답해지곤 했다증상은 약해지다가 심해지기를 반복했고 병원에서는 사회생활 하는 여자들에게 흔히 있는 불안 증세라고 했다심장이 빨리 뛰는 증상을 느끼면서도 마음을 가라앉히며 음식을 먹는 시늉을 하고 있는데 유 선생이 생일 주를 들고 자리를 돌다가 내 곁으로 왔다유 선생은두 사람은 처음이구나하며 이열을 소개했다이열과 나는 명함을 나누어 가졌다옆 사람도 명함을 요구하는 바람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도 명함을 돌리고 받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내 옆에 앉은 유난히 피부가 흰 남자는 보석 디자이너였고유난히 피부가 검은 남자는 국회의원 비서였다

밀라노에서 유학했고 오 년 전에 자기 브랜드 론칭을 했지만 어디까지나 자신은 사장이 아니라 디자이너로 불리기를 바란다는 보석 디자이너는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일종의 직업병인지모든 여자는 보석에 약하다고 믿는 것 같았다시종일관 내게로 몸을 틀어 고개를 기울이고 이야기했는데혈색 좋은 선홍색 입술이 술과 침에 젖어 축축했다나는 반대쪽으로 방석을 조금 밀며 자세를 바로잡았다하지만 피해 봤자 또 다른 옆자리 남자 쪽으로 붙는 셈이니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다국회의원 비서는 줄무늬 넥타이까지 맨 정장 차림이었는데 과연 정치적이고 야심만만해 보였다권력의 역학에 길이 든 지극히 관습적인 남자그런 남자는 여자도 정치적인 힘이나 검은 전략으로 움직일 수 있다고 여긴다혹은 명명백백한 돈의 힘으로도그가 눈을 치켜뜰 때마다 이마에 주름이 잡히며 자신에게 없는 힘을 위장하거나 영향력을 과장할 때 드러나는 야비함이 엿보였다초대객들이 축하주로 가져온 위스키와 와인이 모두 개봉되고 몸 안으로 들어가 섞이면서 사람들은 나지막하면서도 맹렬하게 떠들고가운데 자리에 앉은 유 선생은 자주 웃음을 터뜨렸다낮고 탁하면서도 청명한 고음이 섞여드는 웃음소리였다

자리가 파할 무렵 국회의원 비서는 뜬금없이 내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누구냐고 물었다두 달 전에 이사한 내가 모른다고 하자그는 지역구의 국회의원도 모르면서 지적 유행의 거품이나 일으키는 여자들이 너무 많다고 한탄을 했다눈을 뻔히 뜨고 공개된 자리에서 언어폭력을 당했지만 때마침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어서 대응할 틈도 없었다식당 문 앞에서 유 선생이 손님들과 작별 인사를 하는 사이에 국회의원 비서는 몸을 내게로 바짝 붙이더니 어느 동네에 사느냐고 또 물었다자기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것이었다그는 지역구 국회의원 운운했지만 실은 내가 사는 동네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딴에는 우회해서 정치적으로 치근댔다는 걸 알아채자 어이가 없었다나는 발끈 화를 내며 팔을 잡는 그를 밀쳐내고 돌아섰다거기 이열이 서 있었다


갑시다.

내내 별 말을 걸지 않았던 사람이 계속 지켜보기라도 한 듯 가장 난감한 순간에 끼어든 것이었다어둑한 밤의 그늘 속에서도 그의 눈이 은비늘처럼 빛났다저 눈은 뭐지하는 심정이었다그는 알았을까자신의 눈 속에 깃든 사랑을술 취한 일행들이 얽혀 어수선하게 헤어지는 늦은 밤의 식당 앞이었다둘이 마주 보고 서 있기엔 부적절한 장소였다

이열과 나는대리기사나 콜택시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남겨두고유 선생에게 인사도 못 한 채 언덕길을 말없이 걸어 내려왔다서늘하고 맑은 밤공기 속에 청량한 모과 향기가 나서 긴 숨을 몇 번 들이마셨다도시의 불빛이 반사되어 푸른빛이 도는 밤하늘에 군데군데 엷은 구름이 끼어 있고 구름 사이로 별이 희미하게 돋아 있었다오랜만에 본 밤하늘이었다큰길에서 택시를 잡았을 때이열은 나와 함께 뒷좌석에 탔다택시가 출발하자마자 보석 디자이너에게서 전화가 왔다그는 내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갑자기 사라진 신묘한 능력을 알고 싶다고 너스레를 떨었다그리고 자기의 매장에 내가 방문해 보석들을 평가해 주기를 바란다며 초대했다보석에 관한 안목이야말로 성적 취향의 세련미와 성숙미를 반영한다는 무모한 논리를 들으며 나는 이열의 숨소리를 의식했다보석엔 문외한이어서 관심 없다고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는데성적으로 미숙한 문외한이라고 고백한 기분이 들었다나는 이열을 쳐다보지 못하고 전면을 향한 채 말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에요옆자리 남자들이 늘 그런 건 아닌데.

늘 그런 건 아니라고요?” 

늘 그러면 어떻게 일을 하고 살겠어요하늘에 별의 배치라도 바뀌었나 봐요갑자기 핫한 여자가 된 기분이니.

보석 디자이너와 국회의원 비서 사이에 앉아 좌불안석하더군요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갈 것도 같은데 나가진 않고요그 모습 보는 재미로 앉아 있었어요.

나도 덕분에 숨을 쉬었어요.

내 덕분에요?

말없이 앉아 있는 헛헛한 파워요.

.

그는 자신의 헛헛함에 대해 아는 듯했다

남자들은 혼자인 여자를 귀신같이 알아보고 수작을 해요그게 신기해요.” 

내가 혼자인 것을 고백해 버린 셈이었다

여자들은 못 알아보나요?” 

여자도 알아봐요그쪽 혼자죠?

이열이 클클거리고 웃었다뜻밖의 웃음소리였다젊은 남자 같지 않고 아버지 웃음소리를 흉내 내는 것만 같았다

유 선생님 갤러리에서도 일을 했나요?

미술 평론가이며 큐레이터라고 적혀 있었던 명함을 떠올리며 물었다가볍게 꺼낸 화제였는데 그 순간 말이 끊어지고 긴장감이 생겼다예민한 질문을 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어디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오 년 정도 일했어요그곳을 떠난 지 이 년쯤 되었지요.

막상 음성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심상했다

지금 일하는 미술관에서는 장기 출장이 잦아요일 년에 절반은 일본과 유럽홍콩에서 사는 셈이에요.

그런 생활 힘들진 않아요?

정서적으론 한국보다 외국 생활이 더 익숙해요열한 살까지 마카오에서 살았거든요.

마카오요?

놀라 얼굴을 돌리고 이열을 쳐다보았다어쩐지 외국어를 쓸 것만 같았던 첫인상이 납득되었다마카오로 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짙은 아프리카 향신료 냄새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광둥어를 하겠네요?

그렇죠일본어도 조금 하고불어와 독일어도 조금 하죠영어는 기본이고.

어딘가 결이 다르다고 느꼈지만나와는 너무 먼 세상의 사람 같았다

열한 살 때 아버지가 죽은 뒤엄마와 돌아왔어요트렁크 몇 개만 싣고요.” 

간단한 문장에 인생의 기나긴 이야기와 슬픈 무게가 함축되어 있었다마음이 막막해지며 뒤이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택시가 밤거리를 달리며 일으키는 바람과 바퀴가 메마른 도로에 마찰되는 질감이 느껴지는데도 어쩐지 중력을 벗어나 둥둥 떠 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열이 솜털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처음 본 남자의 마음이 내 몸에 물컹 닿았다나도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밤이었다




[예약판매] 이중 연인

전경린 저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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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그녀에게서 탐욕과 허영의 수준을 넘어선 부패를 보고 말았다. //이 말 좋네요. 나이를 먹어가면서 이런 남자든 여자든을 보게 될 때 역겨워요. 인생 다 알고 있다는 식의 태도와 위선 그리고 가식. 저런 사람은 되지 말아야지 한답니다.

    2019.10.08 22:1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이열이 솜털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처음 본 남자의 마음이 내 몸에 물컹 닿았다./이런 표현은 정말 보기가 처음이에요. 가슴 떨리고 설렌다 이런 진부한 표현, 식상함은 싫거든요.
    이래서 정염의 작가...그런 수식어가 붙나봅니다.

    2019.10.08 22:15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나날이

    처음 만남의 장면, 그렇게 사랑은 오는 모양이군요. 이런 장면을 묘사하는 것은 사랑에바져본 사람의 특권인 듯합니다. 마음이 따뜻해져 오네요. 시작이 애로틱, 진하게 이루어지네요.

    2019.10.09 06:38 댓글쓰기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