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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연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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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침대에 누웠을 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이열이 한 말들이 차례로 다시 떠올랐다갑시다에서부터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까지봄의 솜털같이 여린 눈과 뜻밖의 낮은 웃음소리도그가 입었던 희미한 체크무늬 바지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실소했다체크무늬 바지라니그런 스타일의 남자는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같은 계열의 무채색 셔츠와 재킷에 흡수되었으니 다행이었다길이 든 것으로 보아 평소 그런 차림새인 듯했다나는 오직 혼자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것만 같은 자긍심과 기쁨과 외로움을 느꼈다언젠가 숲속 물가에서 처음으로 갯버들을 발견하고 봄을 깨달았던 때처럼언젠가 이열에게 그날 밤의 눈빛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너보다내가 먼저 알았어네 눈 속에 온 사랑을


그 주의 토요일 열한 시에 이열과 나는 헌책방 앞에서 만났다내가 택시에서 내렸던 장소였다내가 사는 은하수빌라는 은 공예점과 수제화점 사이의 도로 안쪽에 있었다마을버스가 다니는 상점 거리엔 중국집과 가정식 백반집작은 빵 가게와 꽃집헌책방과 손뜨개질 가게수입양품점편의점과 미장원마트부동산중개소 같은 작은 가게들이 시장 입구까지 줄지어 있었다어느 동네나 있는 가게들이었지만 유난히 은 공예점과 손뜨개질 가게가 몇 개나 있었다큰 도로로 걸어 나가 정원이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을 때작은 분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햇살에 부딪혀 수정처럼 빛나고 있었다그날따라 물방울은 날개라도 달린 듯 천천히 떨어졌다정원의 높은 담을 뒤덮은 넝쿨 잎들이 붉게 물들고 얼굴에 닿는 바람결의 온도가 체온보다 낮아서 청량했다

그날 파라솔 그늘이 반쯤 드리운 정원의 테이블에 앉아 브런치를 하며 세 시간을 보냈다이열과 나는 삼 년 만에 만난 절친끼리 쌓아 둔 회포를 풀 듯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일에 대해서어린 시절에 대해서일상생활에 대해서그동안 다닌 여행에 대해서……커피를 석 잔째 리필할 때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우주에 함께 실려 있는 것이다시간이란 우주 질서의 구체적 현현이니까

나는 이열의 외모가 마음에 들었다뺨이 어딘가 소년 같다는 것만 빼고왜 그런지 사탕을 문 것 같은 뺨은 아직도 마카오에서 돌아온 어린 소년 같은 데가 있어서 슬펐다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턱은 어른 남자였다눈빛은 여리지만 총명해 보이고 한편 예리했다부드럽지만 조금 어두워서 안쪽에 어딘가에 어두운 비밀을 숨겨 둔 것만 같았다그렇게 키가 크지 않은데도 기린이나 곰이나 코끼리 같은 커다란 동물처럼큰마음의 규모가 느껴졌다살결은 희지 않았다약간 그늘진 색햇볕을 좋아하는 남자의 살결이었다가슴과 허리와 복부로 내 시선이 미끄러질 때면 목 뒤쪽으로 전율이 지나갔다탄탄해 보였지만 어딘가 공허하고 쓸쓸해서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이열은 마카오에서 사원 근처의 낡은 아파트에서 살았다고 했다바람에 향 피우는 연기 냄새가 날려 오고바닷바람과 향 연기 때문에 창살과 발코니 난간이 빨리 삭고 전자 제품의 수명이 단축된다고 어머니는 투덜댔다

아버진 건설회사에 다녔고마마는 내가 좀 자란 뒤부터 다양한 가게에서 파트타임 점원 일을 했어요하교하고 빈집에 돌아오면 부엌 바닥에 놓인 커다란 주전자에서 미지근하게 식은 말리화 찻물을 따라 마시고 샤워를 했어요그리고 옷을 갈아입고는 소파에 누워 커다란 타월로 몸을 싸매듯 덮고 오수에 빠져들었지요그해의 오후가 요즘도 생각나요그 후론 다시없었던 포근한 시절이었거든요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마지막 해였어요오후 네 시쯤엔 늘 같은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온 집배원이 아파트 계단을 오르며 우편물을 배달했어요집배원이 다녀가면 과외지도 교사가 방문하고그녀가 나가기 직전에 마마가 장바구니를 들고 귀가했어요매일 신선한 재료를 사 두면 곧이어 퇴근한 아버지가 요리를 했지요그사이 마마는 간단하게 청소를 하고요두 분은 그런 식으로 가사를 분담했어요.

이열은 아버진 아버지라고 부르고 어머니는 마마라고 부르는 것이 버릇이 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닭고기나 생선찜 요리를 주로 했는데그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향신료 냄새가 먼저 몰려와요일요일 낮엔 아버지를 쉬게 하고 마마가 만두를 만들었어요만두에도 향신료를 잔뜩 넣었지요저녁은 외식을 했는데 늘 내장탕을 먹었어요내장탕 냄새야말로 압권이지요사람의 뇌를 끓이는 것 같은 무서운 냄새가 났어요아버진 내장탕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마시려고 애썼어요다음 일주일을 위한 식사였지요난 아버지를 존경했어요대부분의 어린 소년이 그렇듯이.” 

이열이 긴 혼잣말을 하는 동안 나도 그의 그리운 세계에 함께 가 있는 것 같았다아버지가 살아 있었던 온전한 세계에

그 나이에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신 건 불행이지만어쩌면 행운인지도 몰라영원히 젊은 남성상을 간직하게 돼요난 늙은 남자를 몰라요.

나도 그랬지만입을 다물고 있었다언젠가나도 그래요나도 같아요라고 말할지 모르지만아직은 쉽게 겹치고 싶지 않았다남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거라고 했는데그 말을 누구에게 들었던가그를 찾아가 확인해 보고 싶었다두 번째 만난 날남자가 내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어요내가 마음을 받은 건가요이열이 이야기하는 동안남중국해에 놓인 다족류같이 무수한 교각을 가진 긴 다리들과 터무니없이 거대한 호텔들이 떠올랐다등이 서늘해지는 악몽 속에서 보는 텅 빈 거인의 나라 같았다페리 선착장 주변의 호텔들과 카지노들과 테마파크와 노란빛 조명이 비현실적으로 환한 세도나 광장과 거대한 계단 위에 앞 벽면만 남은 성 바울 성당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알고 보면 범죄 조직이 많고살인 사건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도시 중의 하나였다이열의 아버지의 선조는 초기 천주교도의 자손이었는데박해를 피해 서해로 밀항해 남중국을 통해 마카오까지 들어가 살게 되었고어머니의 선조는 일제 강점기에 간도로 이주했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마카오로 들어가 자리 잡은 사람들이었다.

거기 가면 모든 것이 내 기억보다 너무 작고 모든 것이 퇴락해 있겠지요난 거긴 가지 않을 거예요.

바다 근처에 있는 아미 사원에 가기 위해 낡은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던 오래된 거리를 지나갔었다거리는 묵은 매연이 덮여 검었고 아파트마다 초라한 철제 발코니가 기도하는 손들처럼 외부로 나와 있었다향 연기에 휩싸인 사원에서 사람들은 한 다발씩이나 되는 향에 통째로 불을 붙이고 양손을 이마 위로 높이 들어 올린 채 굽실굽실 절을 하며 기도했다나도 사랑이 찾아오기를 간청하며 기도했다다른 일은 내가 노력하면 이룰 수 있었지만 사랑은 내 의지만으로 되지 않았다사랑이 어떻게 오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올해 이월에 마카오에 갔었는데,” 

미안하지만 수완듣고 싶지 않아요.” 

이열이 갑자기 나의 말을 막아서 놀랐다나는 이열의 여린 눈빛이 단단하게 응결되는 것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아니고다음에이다음에 듣고 싶군요.” 

누구나 열고 싶지 않은 가방이 있다마카오는 이열이 가장 깊은 슬픔을 담아 둔 가방이라는 걸 난 알아챘다겨우 두 번째 만남에서나는 이열의 밑바닥을 알아버렸고그건 너무 빠른 것이었다말이 끊어진 채 앉아 있었지만 편안했다아무것으로도 대신 채울 수 없는 횅한 쓸쓸함이 거기 있었다비어 있는 큰 집의 폐원처럼 내가 거닐어도빙빙 돌아도뛰어놀아도제멋대로 나가고 들어와도부딪치는 데 없이 자연스럽고 자유로울 것 같았다왜 그런지 모르지만 나는 누군가 나를 버릴 것을 먼저 걱정하지 않고붙들고 놔주지 않을 것을 먼저 두려워했다실은 둘을 똑같이 근심하면서최악은 갇힌 채 버려지는 것이었다나는 마치 갇힌 채 버려진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생생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사실나는 누가 가두지 않아도 스스로 갇히는 성격이었다왠지어느 사이에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난 상대보다 나 자신이 걱정이고 내가 두려웠다그러니 갇히거나 버림받거나그것은 내 연애의 난제였다내가 스스로 갇히면 어느새 알고 나갈 길을 열어 주고그러면서도 늘 가까이 있는 이상적인 남자그것은 사랑에 관한 나의 꿈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정원에 비발디의 여름이 흐르고 있었다우린 가만히 듣고 있었다여름의 선율이 이렇게도 화려했구나가끔 들었는데도 생전 처음 듣는 것만 같았다가장 좋은 시절이 지나간 것처럼 안타까웠다지난여름에는 우린 아직 서로를 몰랐다우린 가을 속에 함께 있었다






[예약판매] 이중 연인

전경린 저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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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남자가 어린 시절을 얘기한다는 건 마음을 주는 것이었군요...

    2019.10.08 22:21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나날이

    읽을 만하네요. 사랑이 어떻게 오는가? 어떻게 지속되는가?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해 주네요.

    2019.10.09 06:34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카라

    두번째 만남에서
    -삼 년 만에 만난 절친끼리 쌓아 둔 회포를 풀 듯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건 우주에 함께 실려 있는 것이다. 시간이란 우주 질서의 구체적 현현이니까-
    -남자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여자에게 마음을 주는 거라고 했는데, - 서로에게 이미 빠져든 것 같네요
    누구나 열고 싶지 않은 가방이 있지만 언젠가 그 가방 속의 비밀을 공유할 시기가 오는 거겠죠? 기대하며 3회와 4회로 고고씽~~~^^

    2019.10.09 13:16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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