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이중 연인 #3





3


그다음 주에 이열은 뉴욕 출장이 잡혀 있었고나는 야근을 해야 했다한 달에 한 주는 머릿속으로 궁리하며 빈둥대다가한 주는 아이템 회의하고 섭외하느라 전화통을 붙들고 지내고 한 주는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나머지 한 주는 원고 쓰느라 야근하는 사이클을 반복하고 있었다그 사이클 안에서 한 달두 달한 해두 해세 해가 겹치며 뭉텅뭉텅 흘러갔다서너 군데 회사를 옮기는 사이 정신 차려 보면 스물일곱그러다가 어느 사이 서른두 살이 되어 있는 것이다특히 지난 삼 년은 일에 묻혀 지낸 시기였다덕분에 경력이 안정권에 접어들긴 했지만.

얼굴 잊겠어요.” 

우린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이열의 눈이 뭔가 대견한 것을 보듯 내 얼굴을 보았다동공이 작아진 눈곤충처럼 순한 눈이었다

겨우 눈 코 입을 익혔는데…….

이열의 시선이 내 얼굴 위에 머물러 있자 나는 불편해서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보지 말아요.

왜 그래요?

갯버들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었다간지러웠다이열도 뭔가 느낀 듯 얼굴에 수줍음이 스쳤다그러자 문득 초점이 정확히 잡힌 듯 이열의 이목구비가 선명하게 보였다그 순간 마음이 열리며 왈칵 정이 흘러갔다아버지 흉내를 내듯 클클 낮게 웃다가도 허점을 드러내듯 수줍어하는 남자이열과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모처럼 즐거웠다아니 기뻤다이열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불이 탁 꺼지듯 꺼져버릴 기쁨이었다






이중 연인 #4






이열은 맨해튼 앞바다를 떠가는 페리 사진을 보내왔다스태튼 아일랜드로 가는 배뉴욕에서 거의 유일하게 바깥에서 시원한 캔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라는 설명과 함께일몰 무렵인지 검은 바다 위에 은비늘이 하얗게 덮여 반짝이고 있었다나는 이열의 눈빛을 떠올렸다마음이 주춤했다이대로 그쪽으로 흘러가도 되는지 마음이 내게 묻는 것 같았다나 이대로 흘러가도 될까.


원고를 쓰다가 장난감을 만지듯 사진을 열어 보았다창밖에 불이 켜지고 밤이 다가올 때아침에 깨어 커피를 마시다가출퇴근하는 택시 안에서은비늘이 덮인 검은 바다가 온통 이열의 눈빛 같았다.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가슴속에 사랑의 세계를 만든다포란기의 새처럼 알을 품고그게 상대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상대의 짧은 눈빛과 순간의 몸짓개연성 없이 툭툭 끊어진 말들과 보내온 사진 한 장 같은 것이 단서가 되어 자신이 낳은 환영의 세계를 포란하는 것이다작은 틈만 있어도 생명이 움트듯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속엔 얼마나 쉽게 환영의 세계가 생겨나는지평범한 사진이 나의 세계 안에서 이열과 나 사이의 최초의 것유일한 것의미 있는 것손에 만져지는 것이 되었다

그 뒤로 이열은 간단한 설명을 붙인 사진을 두 장 더 보냈다귀국하는 날 아침 숙소의 테이블을 찍은 사진 속에서신문과 커피 곁에 놓인 안경을 보았을 때몹시도 그리운 감정이 차올랐다


나는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상대는 스물다섯 살부터 삼 년 동안 교제했던 서교였다어찌어찌 마지막 문턱까지 갔다가 결혼이 무산되었을 때 삶의 난폭함을 알게 되었다삶이란 강철과 시멘트와 유리로 지어진 냉혹한 인공물이었다그에 비하면 사랑은 거품이고구름이고종이배이고 새의 깃털이고아이스크림이었다그렇게도 연약하고 소용없고 흘러가는 것들이었다서교 부모의 결혼관은 명확했다너는 결혼하면 그 여자와 그 여자가 낳을 아이를 평생 벌어먹여야 한다그러니 그 여자가 어떤 값어치가 있는지뭘 해 올지를 계산해야 해.’ 서교 부모의 계산상 나는 기준에 못 미쳤다볼 거라곤 없는 집안이었고 엄마와 여동생은 짐 덩어리였다사랑이 나를 데려간 곳은 사랑이 없는 폐허였다서교에 의하면 나는 누군가 결혼을 반대하기를 기다린 사람 같았다고 했다나는 부모님의 마음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방법을 찾아 노력하기는커녕 순식간에 돌아섰던 것이다서교의 말은 사실이었다나도 반쯤은 결혼이 내키지 않으면서당연한 수순인 듯 구는 서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채 떠밀려 가는 중이었다그 와중에 부모의 속내를 알게 되자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온 셈이었다나와 헤어진 서교는 그의 부모의 계산대로 밑질 것 없는 결혼을 했다결혼 한 첫해 나의 생일날 서교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었다

밤이 내린 황량한 회사 앞에 허술한 목조 조각상처럼 금세 넘어질 듯 서 있는 그를 보았을 때왈칵 눈물이 흘렀다그래서 더 화를 냈던 것이다아무 쓸모 없는 눈물을 흘리는 나 자신의 미련이 수치스러웠고자신이 얼마나 지저분한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서교의 감상도 한심했다나는 총총히 걸어 도로를 건너고 좁은 길로 마구 들어가 뒤따라온 그를 골목으로 밀어 넣었다그리고 두 주먹을 쥐고 온몸을 떨며 욕을 퍼부었다어느 집 담 위로 올라온 오동나무에 보랏빛 꽃이 한가득 피어 있던 늦은 봄밤이었다서교는 한사코 나를 끌어안으며 몸을 밀어붙였고 나는 또 한사코 밀쳐 냈다어느 순간 그의 안경이 벗겨져 내 발에 밟혔다안경테와 다리의 접합 부위가 와지끈 부서지는 감각과 함께 서교가 동작을 멈추었다나는 내친김에 안경알까지 자근자근 밟았다서교는 어두운 골목에서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더듬으며 나갔다앞이 캄캄했을 것이었다그의 뒷모습을 보며나 역시 그때까지도 끝을 내지 못하고 무언가를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우리가 완전히 헤어진 것은 그날 밤이었다


백화점 마트에서 카트를 밀며 장을 보다가누가 떠민 것처럼 와인 매장에 들어섰다가 도로 나갔다그리고 장류와 식품 통로를 지난 뒤 되돌아가 와인 매대 앞에 서서 또 망설였다긴 숙고 끝에 중간 가격대의 부르고뉴 와인을 샀다와인이라니너무 오랜만이었다나는 혼자 술 마시는 습관이 없었다더구나 와인은 혼자서 따기엔 양이 부담스럽다

집에 와인 있는데한잔 더 할래요?’ 나는 샐러드를 만들며 연습했다내 성격으로 볼 때 대견한 용기였다가슴속의 결빙 아래로 이월의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얼음 아래로 투명한 피라미 몇 마리가 헤엄치는 것 같았다피라미는 너무 투명해서 있는 듯 없는 듯 체벽의 안쪽을 간지럽게 스쳤다이열은 첫 만남 이후로 두 번의 데이트에서 나를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으니세 번째에도 아마 그럴 것이었다이열은 장기 외국 출장을 다녀왔고나는 한 건의 인터뷰 기사와 기획 기사를 썼고전체 기사를 취합하고 편집해 넘겼다그리고 얻은 이 주 만의 데이트였다겨우 세 번째 만남이지만 안 지는 한 달이나 되었다한 달 안에 강력한 액션이 생기지 않으면 흐지부지한 관계가 되기 쉬웠다잘하면 술친구아니면 서로 사람이나 연결해 주고 일이나 물어다 주는 지인사회생활 속에서 잇속을 챙기며 돌고 도는 서른 살 넘긴 남녀란 이십 대와는 다르다사실 유별난 프로필도 아니고 눈에 띄게 예쁜 얼굴도 아니고 드러낼 만한 대단한 몸매도 아니었다비비크림으로 겨우 가린 얼굴에 스타킹 신기조차 귀찮아 바지 차림으로 달려 나가 택시 안에서 화장품으로 몇 군데는 메우고 몇 군데는 라인들을 그리고 종일 동분서주하다가 또 하루의 강을 건너고 방에 돌아가 머리카락 말리기도 힘겨워 샤워를 생략하고 겨우 세수만 하고 뻗어버리는 흔한 직장인인 것이다그래서 조급한 것이다어색한 첫 방문에 술은 필수 아이템그리고 첫 방문에는 당연히 와인이다위스키는 너무 세고맥주는 너무 약하니까편안한 방 안에서 나는 외출복을 벗고사적인 모습으로 돌아가 조금 얇고 느슨하고 노출이 있는 옷으로 갈아입을 것이다와인을 마신 후 뒷일은 열어 두는 편이 낫다되어 가는 대로하는 식이다.

그다음엔 이열의 방에 초대받고 싶었다사람을 만나면 그의 방이 궁금해졌다그래서 서둘러 나의 방을 오픈하는 것인지 모른다방은 한 존재의 진정한 현재이다꼭 거기까지가 그 자신인 것이다방을 보여 준다는 것은자기 일상을 소개하는 것이다그가 사용해 온 길이 든 물건들어딘가에서 묻어온혹은 한두 가지씩 모아 온 자신에게만 유의미한 잡동사니들그의 존재가 스며든 벽과 소파와 침대와 가구들이사할 때마다 버리면서도 골라낸 책들, 10년 이상 신체 기관의 하나처럼 끼고 산 오디오 같은 보물들정이 들어버린 낡은 카펫어떤 경위로 들어와 벽에 걸렸으나 이젠 눈길이 잘 가지 않는 그림 두어 점자잘한 인생의 기념품들독신자들의 방이란 거기서 거기이다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미니멀리즘을 선택한다취향이나 추억이나 형편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방그것이 요즘의 유행이다.

방에 대한 나의 강박은 그가 얼마나 독립적인 생태계를 살고 있는지 알아내는 나름의 방식이기도 했다서교와 헤어진 뒤로는 그 부분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독립한 남자인가 아닌가방은 또 성적 강박과도 연결되었다섹스를 한동안 하지 않으면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것처럼 감각이 지워지고 개념만 남는다오래전에 스케이트를 제법 잘 탔다고 해도몇 년이나 타지 않으면 빙판이 낯선 법이다물론 몸을 쓰는 동시에 감각의 기억은 깨어날 것이다그러니까빙판에 오르는 동시에하지만 그 전에는 앞을 알 수 없는 일이어서 창피하게 엉덩방아를 찧을 수도 있고엉뚱한 방향으로 마구 미끄러져 갈 수도 있으며심지어 섣불리 오르다간 얼음판이 도중에 깨어져 바닥 아래로 빠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나는 우선 내 방과 짝을 이룰 그의 방을 알고 싶었다나의 배경 안에서 내 몸을 더 자연스럽게 열고그의 배경 안에서 더 안심하며 그의 몸에 다가가고 싶은 것이다빙판에 오를지 말지잘 미끄러지며 춤을 출지꽈당 넘어질지는 빙판을 디뎌본 다음의 일이었다나는 비교적 간단한 페타치즈 샐러드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었다그리고 덤덤한 척 검정색 바지를 입고 신발장 안에서 잘 꺼내지 않던 초록색 하이힐을 신고 데이트에 나갔다.






[예약판매] 이중 연인

전경린 저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7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아자아자

    그런데 말입니다.
    왠지 이열은 유부남일 것 같아요. 그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뤄진 가정이 아니고, 어찌어찌하다가 이룬 것 같은. 이열이 그래서 수완을 보며 진정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진 게 아닐까 싶은. 이중 연인/이라는 제목이 그렇고, 작가의 책을 두 달 전에 읽어선지...ㅎㅎ

    2019.10.08 22:3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나날이

    언어의 나들이가 맛깔스럽게 다가옵니다. 어떻게 이리 세밀하고, 정교하게 감정들을 그려나가는지, 도움을 주는 언어들이 경이롭게 다가옵니다. 언어의 형연만 해도 이 작품은 충분히 독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잘 읽고 있습니다.

    2019.10.09 06:40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카라

    사람은 각자 자신의 가슴속에 사랑의 세계를 만든다. 포란기의 새처럼 알을 품고. 그게 상대와 얼마나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나 이대로 흘러가도 될까....아무래도 소제목을 보면 내용의 윤곽이 그려집니다 수완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네요 가슴 속에 사랑의 알을 품고, 데이트에 나가는 엔딩이 기대감을 잔뜩 부추기네요 ^^-방은 한 존재의 진정한 현재이다. 꼭 거기까지가 그 자신인 것이다. 방을 보여 준다는 것은, 자기 일상을 소개하는 것이다. - 어쩌면 와인과 치즈를 준비하고 자신의 방을 공개할 생각인 수완이 품고 있는 사랑의 알이 부화하길 기대하게 됩니다.

    2019.10.09 14:45 댓글쓰기

PRID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