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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연인 #7





7


“괜찮은 제의가 들어왔어.”

“어디야?”

“V."

다연이 낮게 속살거리곤 나의 반응을 살폈다. 

“괜찮네.”

다연과 나는 늘 그렇듯 점심 식사 후에 회사 휴게소에 앉아 허브 차를 마시고 있었다. 비밀을 털어놓기엔 그만한 시간, 그만한 장소가 없었다. 신문부터 시사 잡지와 패션과 아트 잡지, 여성 잡지와 골프 잡지까지, 계열사가 함께 쓰는 휴게소 한구석은 다연과 나의 삼십 분 지정석이었다. 잡지들이 얇아졌고 아트와 패션 잡지 중에 하나는 없어질 위기였다. 인원이 줄어드는 속도에 비례해 휴게실도 을씨년스럽게 비어 갔다. 빌딩을 내놓고 이사를 하게 될 거란 소문이 점점 현실성을 얻고 있었다. 

“아, 하지만 막상 옮기는 것도 귀찮아. 이 나이에 낯선 데 가서 파고들기도 지겹다.”

하지만 다연은 옮기게 될 것이었다. 달리 방법도 없었다. 

“수완아, 사무실 만들어서 독립하자. 꾸역꾸역 회사 다니기엔 늦은 나이야. 어딜 가나 낭떠러지라고. 어어 하다가 사라지는 거지.”

내가 반응이 없자 다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너 무슨 일 있니?”

 다연은 고개를 숙이며 눈을 치뜨고 동공을 굴렸다. 지금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눈 떨어진다.”

나는 팔을 쭉 뻗어 다연의 턱을 손에 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왜 그래?”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이지…….”

다연은 말 안 하고 견디나 보자는 식으로 되씹었다. 뭐든 털어놓는 사이니, 그래 봤자 시간문제라고 여길 것이었다. 이열은 모닝 전화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모닝 전화라니, 그런 걸 기대했으니 부끄럽고 한심했다. 이성을 잃은 것이다. 내가 너무 멀리 간 것이다. 다연에게 조언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다연은 당장 그만둬, 라고 할 게 뻔했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이상한 신발을 만났네, 라고 할 것이었다. 다연이 왜 남자를 싸잡아 신발이라고 하는지, 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사는 데 남자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안 뒤부터가 아닐까.

 계획대로 둘이 택시를 탔더라면 이열은 내 집 앞에서 내렸을까, 내 집의 좁다란 이 인용 식탁에서 와인을 마셨을까. 내 방에서 자고 갔을까…….  다연에게 털어놓으면 그런 일이 있기 전에 보라와 부딪쳤으니 다행이라고 다독여 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이라 해서, 참담함과 공허함이 줄어들진 않는다. 무엇보다 다연이 해줄 간명한 충고를 아직 듣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왜 사랑을 하려 할까?” 

다연은 중얼거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정곡을 찔렸지만 나는 모르는 척하고 차를 홀짝 마셨다. 우리 사이엔 무엇을 해도 괜찮았다. 쌩까는 것도 괜찮고, 혼자 말을 다 하는 것도 괜찮고 말을 가로채는 것도 괜찮고 침묵해도 괜찮았다. 특히 술에 취하면 허용 범위가 더 넓어졌다. 누군가의 흉을 보든, 느닷없이 깔깔거리고 웃든, 느닷없이 울든, 화를 내든, 바보짓을 하든, 의자에서 넘어지든, 술집 주인에게 시비를 걸든, 토하고 쓰러져버리든……. 

“수완, 올해 들어 나도 초조해.”

다연이 보기에, 내가 초조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서른두 살은 가임기의 절벽에 선 나이잖아. 부정해도 소용없어. 여기가 길이 나뉘는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어. 사랑? 하고 싶지만, 쿠폰을 모아 커피를 사 마시고, 작은 물건 하나도 사려면 일일이 가격 비교를 하고 다달이 신용카드 할부를 갚느라 목매고 사는 우리가, 돈이 아까워 집에서 염색하는 우리가, 하루에도 수십 번 돈, 돈 하는 우리가 사랑을 할 수가 있을까? 사랑이란 이미 현실 세계를 벗어난 판타지가 아닐까.”

 나는 시계를 보았다. 어떤 날은 삼십 분이 느낌보다 훨씬 길었다. 

“어느 날은 초조한 나머지 사랑이고 뭐고 아무 남자나 붙잡고 절벽에서나 떨어지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해. 하지만 난 아무 남자나 붙잡고 절벽에서 떨어지지도 않고, 난자를 얼리지도 않고 버텨. 우린 담담하게 버텨야 해. 넌 몰라도, 적어도 난 초조하지 않아.” 

“그거 다음 달에 기사 써라. 제목은, 사랑하기엔 늦었고 그냥 살기엔 이르다.”

“뭐?”

 다연이 나를 쏘아 보았다.

“이제 말해 봐. 대체 왜 그러는데?”

 이열과 보라가 도취된 듯 추던 춤이 떠올랐다. 수돗물처럼 쏟아지던 보라의 눈물도. 누구나 둘만의 영화를 보는 제 삼의 관객이 되긴 싫을 것이다. 불행한 사랑조차, 실연조차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화려한 것이다. 그 자리에선 안 그런 척했지만 새삼 가슴이 아렸다. 

 “뭔데, 왜 그러냐고?”

 다연은 특유의 고문 자세로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다족류처럼 움직였다. 열 손가락을 고물거리며 다가와서 토설할 때까지 턱을 간지를 것이었다. 나는 다가오는 손을 뿌리쳤다. 다연의 충고 덕분에 썸만 타다가 잘려 나간 신발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뭐라고 털어놓아도 한심했다. ‘오랜만에, 아니 몇 년 만에 연애 감정이 생겼는데 말이야, 그 남자가 세 번째 데이트에서 다른 여자와 춤을 추고 복도 끝 방에서 섹스 한 거 같아…….’ 말 끝나기 무섭게 다연은 ‘끝’ 하고 결론을 낼 것이다. ‘거지발싸개 같은 해프닝이군. 거론할 가치도 없다.’ 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변명을 할 것이다. ‘아니, 마지막까지 갔는진 모르겠어. 확실하진 않아. 안 갔을 수도 있어. 그래서 고민하는 거야.’ 그러니 고민하는 게 당연하다. 오랜만에 연애 감정이 생겼는데, 그거 귀한 건데. 

 “네 꼴이 어떤지 아니? 포란하는 새 같다.” 

 겨우 한 달 안 사람이 그만큼이나 나를 괴롭힐 수 있다니,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쉽사리 잘라 낼 수가 없었다. 

“말 안 해? 말 안 해?”

다연의 열 손가락이 고물거리며 다시 다가왔다. 마침내 손가락들이 턱을 간질이는데도 나는 정말 포란하는 새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품속에 이제 막 낳은 따뜻한 알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이중 연인

전경린 저
나무옆의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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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워블로그 나날이

    30이 넘어가면서 겪는 여성으로서의 아픔이 잘 드러난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할까? 세상 풍조대로 가는 것이 좋은가? 외롭더라도 견디는 것이 좋은가 고민과 결단의 시간이 30대 초입이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2019.10.23 17:12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바부탱이

    동료 다연을 통한 수완의 마음을 알아가는 장면인 것 같은데...30대에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일상적인 휴게실 공간에서 마주하는 이야기들... 글고 수완이 이열과 그냥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아 다연에게 속마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 상황들...왠지 이열에게 향하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아요...다음편에는 이열을 만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게 될까요?

    2019.10.24 21:50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카라

    사랑이란 이미 현실 세계를 벗어난 판타지가 아닐까.
    오랜만에, 아니 몇 년 만에 연애 감정이 생겼는데 끝까지 기대하고 희망을 품었던 이열은 모닝 전화도 없다
    마음속의 혼란한 감정 앞에 수완은 겨우 한 달 안 사람이 그만큼이나 나를 괴롭힐 수 있다니, 어딘가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도 쉽사리 잘라 낼 수가 없었다.
    이열에 대한 감정을 친구 다연에게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는 수완은 정말 포란하는 새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품속에 이제 막 낳은 따뜻한 알이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알을 품을 땐 그 알이 깨질새라 조심스럽고 소중하게 품게 되는 어미새를 연상하게 된다.결국 수완은 이열에 대한 감정을 키워가게 될 것 같다! 이중연인~~~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어쩜 헤어졌다고 생각했던 보라와의 관계도 이어가며 수완까지 이중 연인으로 둔 마초 같은 이열.그에게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수완의 선택은 사랑일까?아님 지독한 외로움의 대체품일까? 예상할 수 없는 전개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네요.꼭 끝까지 읽고 싶어요!!!

    2019.10.25 12:00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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