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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일기장에서 나눈 문답입니다.

목연샘!

그대의 고향 서석천주교회에서의 추억을 들려줄 수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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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천주교회는 내고향인 홍천군 서석면 풍암리에 있습니다.
서석면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던 선친께서
공소에서 본당으로 발전하기까지 주축의 한 분으로 활동하셨고,
나는 선친의 영향으로 초창기의 주일학교 학생이자
중등부 학생회 활동을 하기도 하였고요.

내게 있어서 선친을 비롯하여 임숙녀 회장님, 조필립보 신부님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신화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 시절의 추억들을 이곳에 옮겨보겠습니다.

         춘천교구의 열 분의 신앙선조들


천주교 춘천교구 사목국에서는

춘천교구 70주년을 기념하여 <우리선조 우리터전>이라는 책자를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교구 설정 70주년 동안
모범적인 신앙 활동을 펼치신 열 분을
신앙의 선조로 소개하고 있고요.
이 열 분은 주교님 두 분과 신부님 두 분,
그리고 평신도 여섯 분입니다.

이 열 분 중에는 저에게 견진성사를 주신 구토마스 주교님.
저에게 첫영성체를 해주신 조필립보 신부님,
저에게 유아세례를 주시고 교리를 가르쳐 주신 임숙녀 전교사님,
저의 선친이신 연규필 회장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는 분들이
열 분 중에 네 분이나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선조 우리터전
춘천교구 사목국에서 교구설정 70주년을 맞이하여
2010년 3월에 펴낸 기념 책자입니다.


우리선조 우리터전에 실린 네 분
위의 두 분은 구 토마스 주교님, 조 필립보 신부님,
아래 두 분은 임숙녀 전교사님, 연규필 회장님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큰 그림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책자에 실린 열 분 중에
제가 정리한 것은 저의 선친에 대한 것밖에 없으므로
이곳에서는 선친에 대한 내용만 소개합니다.
이 글은 2009년 7월 12일과 7월 19일에
춘천교구 주보에 실렸을 때 춘천교구 사이트에서 옮겼습니다.


             연규필 안드레아(Ⅰ) 1930. 7. 25 ~ 1974. 4. 28
                          -2009년 7월 12일-

 

연규필 안드레아 회장은 1930년 7월 25일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 수하리에서 태어났다. 연회장의 부모는 전혀 종교를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당연히 연회장 자신도 신앙과는 무관한 성장기를 보냈다. 더구나 강원도 산골에 교회란 찾아볼 수 없었고 온갖 미신과 무속이 성행하던 때였다. 훗날 연회장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자신이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연회장은 해방 후 비교적 어린 나이에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인제군 신남면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군에 입대한 얼마 후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은 그의 모든 삶을 바꾸어 놓았다. 전쟁 중에 그는 전선의 한 가운데에 있었고, 매우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양쪽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되었다.

 

후방의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전시의 열악한 의료 환경 속에서 치료는 불가능했고, 결국 두 다리 모두를 절단해야 했다. 젊은 나이에 다리를 잃는 치명적 상처 속에서 그는 하느님을 만났다.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중 천주교를 알게 되어 세례를 받은 것이다. 하느님은 그를 복음의 사도로 쓰시기 위해 먼저 당신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도록 섭리 하셨다.

 

상이군인으로 고향에 돌아온 연회장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그 무엇을 찾게 되었고, 세례 받은 신앙에 따라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서석에는 성당은커녕 천주교 신자 한명 없었다. 동네에 교회라곤 감리교 하나뿐이어서 그곳을 찾아가 성당이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성당은 없으니 그냥 감리교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으나, 연회장은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며 물어물어 성당을 찾았다.

 

결국 1956년 홍천성당을 찾아 조선희 필립보 신부를 만난 연회장은 조신부에게 서석에 성당을 세워줄 것을 간청했다. 그 당시 죽음의 행진을 거쳐 3년 간의 전쟁포로 생활에서 생환한 조신부는 새로운 사목적 열정으로 홍천지역에 대한 선교활동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지리적으로 매우 넓고 교통이 불편하여 복음의 씨앗이 전혀 뿌려지지 않았던 서석 지역에 대한 선교에 어려움을 겪던 조신부에게, 연회장의 존재는 하느님이 보내주신 선물이었다. 조신부는 즉시 서석 지역을 답사한 후 성당 부지를 매입했고, 임숙녀 보나 회장을 전교회장으로 임명하여 서석에 파견하였다. 이로써 서석 지역 복음화를 위한 세 명의 사도가 함께 활동하게 되었다.

 

서석에 공소가 설립되었고 연회장은 공소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공소 초기 선교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미신이 만연한 시골에서 외국인 사제와 젊은 여성 전교회장, 그리고 목발을 한 공소회장에게 전교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과 연회장의 굳은 믿음은 차츰차츰 그 결실을 맺어 갔다. 예비자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세례 받은 새 신자들이 또 다른 예비자를 교회에 데려 왔다. 젊은 청년들이나 어린 학생들도 성당에 나오게 되었고, 차츰 공소의 틀이 갖추어 지기 시작했다. 처음 공소를 시작한 초가는 날이 갈수록 좁아져, 결국 조신부의 결정으로 장차 본당으로 승격한 후에도 쓸 수 있는 공소 경당을 건축하게 되었다.

 

 

                   연규필 안드레아(Ⅱ)
                          -2009년 7월 19일-


홍천본당 주임 조선희 필립보 신부의 지원으로 서석공소를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가난한 살림에 건축비를 부담할 수 없었던 신자들은 대신 자신들의 몸으로 온 정성을 다했다. 평일에는 순번을 정해서, 주일에는 모든 교우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곡괭이나 삽, 호미를 들고 터를 닦고 흙을 옮기며 성전을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 본격적인 건축이 시작된 후에는 강에서 자갈을 주워 오고, 돌을 깨고 벽돌을 찍는 등, 비신자들도 감탄할 개미역사가 계속되었다.

 

두 다리에 장애가 있던 연회장은 직접 노동에 참여할 수는 없었으나, 신자 공동체를 이끌며 문제를 해결하는 등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가끔은 너무 오래 서 있다 보니 의족에 닿은 살이 갈라져 피가 나기도 했다. 연회장을 중심으로 하나가 된 신자들의 헌신적이고 눈물어린 노력으로 마침내 1958년 10월 30일 서석공소의 축복식이 거행되었다.

 

연회장은 서석공소의 회장으로 오랫동안 교회를 위해 봉사했다. 평상시에는 공소예절이나 모임을 주도하고, 주임신부가 오는 날이면 모든 신자들에게 연락하여 미사를 준비시켰다. 심지어 수업 중인 학생들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도록 직접 학교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회장의 열성적인 활동과 봉사의 결과 1965년 9월에는 생곡에도 공소가 설립되었고, 1968년 5월 드디어 서석공소는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신자 한 명 없던 지역에 연회장이 조신부를 찾아가 성당을 세워줄 것을 간청하여 공소가 설립된 후 열두 해 만의 일이었다.

 

본당으로 승격한 후 연회장은 본당회장이 되어 여전히 교회를 위한 봉사를 계속했다. 일찍이 어린 나이에 결혼한 연회장은 자식들을 위한 신앙교육에도 매우 엄격했다. 미사가 있는 날이면 공심재를 지키기 위해 아예 아침식사를 굶기기까지 할 정도였다. 자녀들을 성당에 보낼 뿐 아니라 비록 어린아이들이라도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봉사는 알아서 하도록 가르쳤다.

 

세상일에서도 항상 바쁘게 살던 연회장은 늘 전쟁으로 인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그러던 중 어린 아들을 잃는 인간적 상처를 당하면서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고, 짧은 투병 기간을 거친 후 1974년 4월 28일 마흔다섯의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연회장과 더불어 활동했던 임숙녀 보나 전교회장은 이렇게 그를 회고했다. “연회장은 참으로 훌륭한 주님의 사도였다. 생각해 보면 서석본당의 기원은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그것과 유사했다. 최초로 세례 받은 이승훈 베드로가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여 조선교회가 시작되었듯이, 연회장 역시 그러했던 것이다. 처음 조신부를 찾아왔을 때 그는 하반신을 나라에 바친 스물다섯의 젊은이였다. 그리고 나머지 상반신은 하느님 사업에 봉헌했다.” 절망의 나락에서 하느님을 만나 나머지 삶을 그분과 함께 살았던 연규필 안드레아 회장은 주님이 뽑아 세우신 믿음의 사도였다.


 춘천교구 사이트에 실린 연안드레아 회장

 2009년 7월 무렵 춘천교구 사이트에서 캡처했습니다.


* 자료 출처 : 천주교 춘천교구 주보(2009년 7월 12과 19일 2회 연재)와

  춘천교구 사이트에서 옯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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