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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1

[도서] 대지여 꿈을 노래하라 1

밀드레드 테일러 저/위문선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주인마님이라고 불렀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재능을 시기받는 것도 모자라 죽임을 당할 처지에 놓였다. 이는 당시 조선시대의 <적서차별>이라는 관습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홍길동은 이 때문에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이 책의 주인공 <폴 에드워드>는 남북전쟁을 치른 직후의 미국사회에서 백인 아버지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흰 깜둥이>인 탓에 사회적 모순을 온 몸으로 겪고 이를 이겨낸 인물이다.

 

 장황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변명이라면 책을 읽으면서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는데>, 그리고 <지금도 이런 식의 차별이 심각하구나>라고 새삼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과 같은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계층은 조선시대 <중인>, 즉 <서인출신>이 있었다. 흔히 <서출>이라 부르며 아버지는 버젓한 양반 계층인데도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종 아닌 종의 신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또 오늘날에는 어떤가.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는 <신분제>는 무너졌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새로운 계층구분법이 생겨나 애써 귀천을 따지는 풍토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근래는 <외모>도 한 몫하는 경향이 강해진 듯 하다.

 

 이처럼 사람을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차별>은 왜 뿌리 뽑히지 못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접한 책에서 말하길, 한 미국흑인이 자신의 몸에 얼마만큼 아프리카 선조들의 피를 물려 받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유전자 검사를 해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자신의 겉모습은 비록 흑인지언정 유전자는 아프리카 흑인들의 것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미국 흑인은 자신들의 선조인 아프리카인보다 유럽 백인들의 유전자를 가진 셈이다. 그렇다면 피부색이나 외형적인 조건만으로 차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재산이 많은 정도에 따라서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나눌 수는 있을지언정 재산의 많고 적음이 특정 권력이나 지위를 세습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도 안 될 것이다. 또한 외모의 미추는 물론이려니와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따져 개인의 꿈을 이룰 가능성마저 강탈하는 일이 벌어져도 안 될 것이다. 이는 누구나 인정하는 터이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A가 옳고 B가 그르니 A를 따르는 게 합당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B일 경우가 많다. 이런 사회적 모순에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작가는 분하지만 <주먹>이 아닌 <머리>로 대처하라고 지적한다. 폭력으론 또 다른 폭력을 부를 뿐, 진정한 해결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순응하라고, 부조리에 편승에 스스로 모순에 빠지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힘의 억압을 힘의 논리로 해결할 때는 해결될 문제마저 더 큰 문제에 빠지게 마련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 촛불이 그걸 확실히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대학생 시절에 우피 골드버그 주연의 <컬러피플>이란 영화를 보면서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생각난다. 미국에서 흑인(유색인)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는지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였다. 단지 고달픈에 흐느끼는 그들의 고통과 아픔 때문에 흘린 것은 아니었다. 우피의 아들이 자기 주장이 강한 아내, 곧 우피의 며느리가 세상의 부조리를 힘으로만 해결하려나 동료 흑인들에게 몰매를 맞고 돌아온 뒤에도 상처가 치유되자마자 또 다시 힘으로 해결하려들자(이 때 아내는 남편의 무능함을 질타한다) 남편이 말리며 어머니(우피)에게 도움을 청하자. 우피 왈, <때려 줘!> 그리고 며느리의 따귀를 때린다.

 

 때린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한참을 고민했는데도 영화는 계속 이어졌고, 3시간여가 지난 뒤 영화가 끝나자 나는 눈물을 흘렸다. 그건 사회 부조리에 맞서며 나 역시 부조리한 방법으로 해결하려할 때 그건 단지 복수일 뿐, <진정한 해결>이 아니라는 가르침이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세상은 공정하거나 공평치 못하다고. 그러면서 왕왕 본때를 보여줘야 해결이 될 거라고 말한다. 그러나 공정치 못한 방법으로 본때를 보여준들 공정한 세상은 오지 않고, 공평치 못한 방법을 사용해도 마찬가지다.

 

 신분차별이 심할 때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흥분하며 <혁명>으로 본때를 보여주었지만, 그뿐. 대부분 <혁명>이전의 세상으로 되돌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본때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결국 신분차별이 없는 세상이 훗날 도래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덕분에 또 다른 <차별>이 생겼다. 이 차별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계속 피를 흘리는 수고를 해야할까?

 

 아니 별로 현명치 못한 방법인 듯하다. 부조리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은 설령 처음엔 몰랐더라도 <공명정대>한 것에 맞닥뜨렸을 때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건 <공명정대>의 가장 훌륭한 무기가 <떳떳함>이기 때문이다. 이 <떳떳함>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마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진실되고 강력한 무기가 된다. 세상 어떤 부조리도 이 <떳떳함> 앞에서 당당함을 느낄 수 없고 이는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진리>다.

 

 비록 거대한 사회 부조리에 불편을 겪고 억울함에 분노가 치올라도 내가 <떳떳하>면 잠시 고개를 숙여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못된 세상에 살고 있는 덕에 목숨을 구걸하더라도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면 결국 못된 세상은 가고 좋은 세상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니 <믿음>뿐이라도 좋다.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떳떳함>을 고집하다 죽음을 맞이해도 억울할 것은 없을 것이다. 세상 모든 <떳떳함>이 그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할 것이기에. 하지만 목숨은 소중한 것이다. 이 때 갈릴레이의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명언이다.

 

 이 책을 읽을 이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항상 매사에 늘 <떳떳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깡패나 조폭같은 무리들 앞에서 <무모해>지라는 것은 아니다. 적절할 때 혹은 피치 못 할 때 <비굴해>질 수도 있다. 날 아프게 하고 죽이려 하려는 데 나 아프게 해줘, 날 죽여주라고 것은 <진정한 떳떳함>이 아닐 수도 있다. 모든 거짓말이 다 나쁜 것이 아니듯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듯 상황에 따라 <떳떳함>의 방법이 다를 수도 있지만 마음만은 변치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떳떳한>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그래서 글이 길어졌는지는 몰라도 필요없는 말을 쓴 것 같지는 않아 위로가 된다. 요즘 살기 힘들다. 마구 욕지기라도 하고 싶다. 꼭 누구 덕분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 때문이리라. 그리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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