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1592년 선조 25년에 일어난 '7년 전쟁'이며, 병자호란은 1636년 인조 14년에 일어나 '2달 남짓' 버티다 굴욕을 당한 전쟁이다. 이 책은 왜란 직후부터 호란 직전까지 햇수로 '38년 동안'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전쟁을 치룰 수가 있느냐는 원초적인 질문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전쟁의 원인'을 찾아봄으로써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도가 더 깊게 다가왔다.
1) 임진왜란은 왜 일어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부터 세종 대까지는 '사대교린 정책'이 비교적 잘 유지되었다. 대국(大國)에게는 사대를 함으로써 명나라의 침략을 막고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북방과 해안을 노리는 여진과 일본에게는 '장사로 이득을 챙겨주는 교린정책'을 써서 침략을 막는 방법을 비교적 잘 해왔다. 더구나 세종 때에는 북방을 향해서는 '4군 6진'을 구축해 여진의 침략을 땅이 아닌 '강'을 경계로 하여 막겠다는 계산이 섰고, 왜구의 본거지였던 '대마도'를 정벌함으로써 왜구를 소탕함과 동시에 배고프면 쳐들어오는 '대마도 주민들'까지 본때를 보여주어 조선의 국방을 튼튼히 할 수 있었다.
암튼,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고 그 '이북 지역'에는 조선에 호의적인 여진족을 포섭하여 조선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한 것은 매우 유효한 작전이었으며, '대마도 정벌'로 일단 왜구들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고 '제한무역'을 실시한 것으로 살살 달래는 방식이 일단은 잘 들어맞아서 조선은 안정된 국방을 유지하며 '200여 년간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원인이다.
그러나 마냥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먼저 남쪽의 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남해안을 중심으로 '왜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만 해도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이 쳐들어와봤자 '왜변' 수준이겠거니 하고, 안이한 판단을 하고 있을 정도로 '정세 판단'에 심각한 허점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일본의 정세를 직접 보고 온 '두 신하' 마저 당쟁의 논리에 빠져서 서로 의견이 달랐던 것도 '큰 실수'일 수밖에 없다. 전쟁이 발발하고 난 뒤에 '김성일'이 아무리 목숨을 다바쳐 싸웠더라하더라도 이미 전쟁은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대비할 수 있는 '시간'마저 앗아가버리고 말았으니, 이것이 두 번째 원인일 것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문제점은 변변한 '군대'를 보유하지 못한 것이다. 아무리 200여 년의 평화가 지속되었다고 하더라도 '국방력'은 나라의 근간이다. 그런데도 조선은 국방력을 갉아먹는 제도, 바로 '양반들의 군역 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지어 양란이 끝난 뒤에도 말이다. 이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하는 '귀족의 의무'를 전혀 지키지 않은 셈이다. 평상시에 누릴 건 다 누리면서도 위급시에도 가장 먼저 도망치는 '양반들의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 가장 큰 원인인 셈이다.
2) 병자호란은 왜 일어났나?
그렇다면 왜란을 승리로 마무리한 조선은 왜 100년도 안 되어서 또다시 전쟁을 치뤄야 했고, 굴욕적인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사실 조선은 왜군이 쳐들어왔을 때 '조총의 위력'에 큰 몸살을 앓았다. 조선도 천자총통 등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기에 왜군의 '조총'이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는 무기였다. 그런데도 호되게 당했다. 그것은 재장전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연사 속도'가 너무나도 느리다는 점만 믿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3줄로 나란히 선 '조총수'들이 번갈아 쏘는 방식으로 '연사 속도'를 확실히 높이니 조선의 주력 부대인 '보병'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포르투갈제 '조총'은 날아가는 새로 맞출 정도로 '정확도'가 높았기 때문에 100m 안에서는 백발백중이었을 뿐만 아니라 오랜 훈련시간을 거쳐야 제대로 쏠 수 있는 활에 비해서 간단한 훈련만으로도 어느 정도 사격실력을 기를 수 있는 '조총수'로 무장한 왜군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서도 왜란 이후부터 '항왜'를 훈련교관으로 삼고 '조총수'를 양성하기에 이르렀다. 거기다 3열로 늘어섰던 왜군들보다 더 많은 5열로 늘어서서 사격을 하는 '윤방'을 터득하고부터는 조선의 조총수는 대단한 화력과 정확도를 자랑하는 훈련도감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단병접전'에 강한 왜군을 상대로 하기 위해서 척계광이 만든 '원앙진'이라는 새로운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조선군은 왜군이 다시 쳐들어온다해도 더는 호락호락하지 않는 훌륭한 군대를 보유한 셈이었다.
그런데 여진의 주력은 '기병'이다. 기병은 말을 타고 빠른 기동력을 발휘해서 전장터를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어디 그뿐인가. 기동력이 빠르다는 건 '다양한 작전'을 구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기다 '북방민족'의 말 다루는 솜씨(마상기술)는 달리는 말 위에서 온갖 묘기를 다 부릴 수 있으며 말의 배나 엉덩이에 몸을 숨기고 달려와 조총과 활과 같은 '원거리 무기'의 공격에도 부상을 입지 않고 사방팔방에서 쳐들어올 수 있다는 점이다.
더구나 조선의 보병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아서 수비를 하려면 '산성'으로 들어가 숨어야 한다. 그런데 기병을 갖춘 '후금'은 산 속에 틀어박혀 있는 조선군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냥 '한양'을 향해 달릴 뿐이었다. 그래서 조선은 '이괄'을 총대장으로 삼고 '안주(평안도는 평양과 안주)'의 길목을 지키며 숙련된 기병과 보병, 그리고 조총수까지 모아놓았는데, 바로 그 '이괄'이 '인조반정 이등공신'이라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숙련된 병사들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3) 인조반정은 왜 일어났나?
우리는 광해군의 '실리외교'를 알고 있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로 조선을 잘 운영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고 있는 '사실'은 바로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라가 망했을 거라는 논리로 똘똘 뭉친 사대부들은 '재조지은'을 외치며 명나라를 도와 후금을 쳐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다. 이에 광해군은 어림도 없는 소리라며 명나라에 원군이나 도움을 주지 않겠다고 버티는데, 여기서 '결정적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인목대비 유폐나 영창대군, 임해군 살해와 같은 일은 '왕실'에서는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일이라서 큰 허물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반대하는 신하'를 다독이고 설득하지 못한 것은 광해군의 뼈 아픈 실책이었다. 설득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해도 '무식하다'고 비아냥대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욕설도 내뱉었다고 하니, 이미 '중종반정'을 경험한 신하들이 '참지 않았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어설펐던 '인조반정'이 덜컥 성공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1년도 안 되어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조선의 국방력은 '제로'에 가깝게 되고 말았다. 그나마 남아있던 군사들도 '또다시' 난을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여 감시를 받기 일쑤였고, '출세욕'에 눈 먼 멍청이들의 '고변'으로 인해 아무 죄 없는 신하들까지 사형을 당하거나 고문중에 사망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인조'는 명을 돕겠다고 주둥이를 나불대다가 훗날 청 태종이 되는 '홍타이지'의 공격에 속절없이 항복을 하고 만다. 조선의 장기인 '남한산성'에 들어가 수성(守城)전을 펼쳤지만, 급작스럽게 피난을 온 터라 변변한 무기는커녕 임금이 먹을 식량도 마련하지 못하고 그저 버틸 뿐이었다. 후금의 공격도 없기는 매한가지다. 그냥 산을 애워싸고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무엇하러 병력을 소모시키면서 싸우려 들겠는가 말이다. 거기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이 일어나 이 땅을 지켰지만, 병자호란 때는 변변한 의병도 일으키지 않았다. 왜냐면 의병을 일으켰던 양반들이 대부분 '대북(북인)'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인조반정' 때 광해군을 몰아내면서 함께 숙청시켜버렸는데, 누가 의병을 일으켰겠는가. 그나마 일어났던 의병도 후금군과 본격적으로 싸우기도 전에 임금이 항복을 해버리고 말았으니 차라리 애꿎은 목숨이라도 살릴 수 있었던게 천운일지도 모르겠다.
4)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선조, 광해군, 인조는 '무능한 임금'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들은 '평화시'에는 성군에 못지 않은 능력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인조는 빼고라도 말이다. 그런데 '격동의 시대'에서는 허탕만 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분탕질까지 저지르는 어처구니 없고 대책도 없는 임금들이었다. 거기다 조선의 귀족인 '양반들의 무책임'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백성들은 이런 임금과 양반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들은 무능함을 넘어서 '저들이 해야 할 일'까지 내팽개치고서 저만 살겠다고 나몰라라 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양난 이후의 조선'에서 '백성들의 각성'이 일어나 '농민봉기'와 같은 일이 수차례 이어졌고, 끝내는 '동학농민운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이제 겨우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식수준'이 성장하였는데 역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외세의 침탈'이 가장 심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 왜란에 당하고, 호란에 당하고, 일제에 나라까지 빼앗기지 않았는가? 거기다 '냉전시대의 희생양'이 되어 한국전쟁까지 치뤘다. 언제까지 '지배세력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곤혹을 치뤄야 하겠냔 말이다. 이제는 더는 그런 '지배권력'이 생기게 두어서는 안 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기도 하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세력에게는 절대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