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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22:00~24:00)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3:30 , 읽은 쪽수 : 12쪽 ~ 67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9권 제1장 : 대원군의 개혁 ]

  고종의 즉위로 '대원군의 집권'은 시작되었다. 임금의 아비가 '살아있는 권력'으로 등장한 셈이다. 아시다시피 '흥선대원군'은 집권하면서 개혁정책을 실시하였다. 비변사 철폐, 호포제 실시, 서원 철폐 등등 기세 등등하던 '세도정치'를 단 한 방에 잠재우며 흥선대원군은 백성들의 환호를 단박에 받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흥선대원군' 혼자서 했을까? <야사>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록>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실상 '대원군'은 궁궐 안으로 들어가는 일조차 드문 일이었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적게 드나들면서 그 모든 일을 다 도맡아서 추진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을 도와준 이는 누구였을까? 이는 고종의 수렴청정을 맡았던 '효유대비'의 업적이었다. 그동안에는 '여자'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역사관' 탓에 그 업적이 낮게 평가되었지만, <실록>에 적힌 기록만으로도 '효유대비'가 앞장서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고, 흥선대원군은 개혁정책의 방향을 제시하는 등 두 사람의 캐미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그간의 '기록'은 <야사>에 기대어 '상갓집 개'를 자처하며 서슬퍼런 안동 김씨의 감시속에 숨죽여 살던 이하응이 '풍양 조씨'인 효유대비와 손잡고 '안동 김씨 가문'에게 처절한 복수를 한다는 줄거리로 기억하고 있지만, 실상 '대원군의 집권시기'에 안동 김씨가 벌 받거나 죽어나갔다는 '기록'은 그닥 없다. 특히 집권 후에도 정승과 판서의 상당수를 여전히 '안동 김씨'가 도맡고 있었으며 대왕대비와 대원군의 개혁정책을 찬성하고 지지한 이들 역시 '안동 김씨'였다는 사실을 보면 <야사>의 내용에 신빙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세도가문'에 뇌물을 주고 지방관직을 꿰차고 탐욕을 부리던 관리들은 죄다 벌 받고 유배 보내지는 일을 받긴 했다. 허나 이를 '대원군의 안동 김씨 복수극'으로 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보통 집권 초기에 일어나는 '개혁정책의 조치'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기 때문이다.

 

  허나 이렇게 착착 추진하던 개혁정책이 모두 잘 된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경복궁 중건'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엄청난 국고가 든다는 이유로 그동안 방치한 덕분에 옛궁궐터에는 잡초가 무성했지만, 어느 임금도 다시 세울 엄두를 내지 못했던 터다. 그런데 흥선대원군이 과감히 '왕실 재건'이라는 카드를 내밀며 '경복궁 중건'을 밀어붙였고, 대왕대비 역시 대원군의 의도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큰 문제는 '돈줄'이었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데에도 엄청난 돈이 드는데 몇 곱절이나 더 확장을 하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개혁정책'으로 인해 빵빵해진 국고가 금방 바닥을 보였던 것이다.

 

  이런 자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원군은 비장의 카드를 두 장 꺼내 들었다. 바로 '당백전 발행'과 '원납전 실시'였다. '당백전'이란 말 그대로 '엽전 한 닙'이 '엽전 100전'과 같다는 뜻인데, 이는 '발행비용'은 최대한 줄이고 명목상 '화폐가치'는 최대로 높여서 막대한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의도였는데, 그야말로 폭망해버리고 말았다. '화폐가치'라는 것은 '사회적 약속'에 기인하는 것인데 '실물'도 없이 엄청난 금액에 해당하는 화폐를 그대로 시중에 유통을 시켜버렸으니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물가 급등'이 뒤따르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해버린 것이다. 거기다 애초에 '100배'의 가치를 보장했던 화폐가 최대 70~90%까지 하락한 채 거래가 되니 '당백전'이란 화폐는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손해를 보는 '악화(惡貨)의 대명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엄청난 물가상승이 발생해서 백성들의 삶이 파탄난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또 하나는 '원납전 실시'였다. 당백전 발행으로도 자금부족을 해결하지 못하자 양반을 비롯해서 백성들에게까지 '원해서 내는 돈'이라는 뜻으로 '원납전'을 특별세금으로 거둬들였는데, 당장은 '대원군'의 권력이 무서워 돈을 마련해서 냈지만 한 번만 거둬가는 것이 아니라 공사비가 부족할 때마다 자꾸 거둬가니 양반들의 볼멘소리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거기다 일반백성들에게는 '돈' 대신에 '노동'을 강제했으니 백성들의 원성 또한 함께 드높아진 셈이다.

 

  만약 대원군이 '원납전'을 양반들에게만 특정해서 거둬들이고 그동한 탐욕스런 수탈을 일삼았던 '세도가문'과 '탐관오리' 들만 색출해서 징벌적 징수를 했더라면 양반들의 불만은 불만대로 '정상참작'을 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통쾌함을 느껴 대원군의 지지가 더욱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되찾는다'는 낡은 사고방식에 갇혀서 양반과 백성을 가릴 것이 없이 돈과 노동을 거둬들였으니 그야말로 패착을 내고 말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훗날 '권불십년'이라는 말과 함께 '대원군 실각'이 이루어지게 되니, 초심을 잃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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