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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22:00~24:00)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54 , 읽은 쪽수 : 104쪽 ~ 141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9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19권 제3장 : 대원군의 실각 ]

  대원군과 관련된 유명한 사자성어는 '권불십년'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가졌더라도 그 권력이 십년을 가지 못한다는 의미로 널리 쓰이는 말인데, 비슷한 말로 '화무십일홍'이 있다. 열흘 이상 피어 있는 꽃은 없다는 뜻인데, 이 또한 '권력'이 영원하지 않다는 뜻으로 정치인이나 유명인들에게 두루 쓰이는 말이다. 마침맞게 대원군의 집권도 딱 10년이었는데 '최익현의 상소'로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는 과정이 참 묘하게 이어진다.

 

  열두 살의 소년 임금인 '고종'은 효유대비(효명세자의 빈)의 수렴청정으로 시작하지만 효유대비와 정치적 파트너를 자처했던 흥선대원군이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효유대비가 3년 만에 수렴을 거두면서 대원군이 정면에 등장하였지만, 이미 수렴 때부터 은근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으며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고도 대원군은 개혁정책을 밀어붙이며 고종의 든든한 뒷배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렇다면 대원군의 정책은 성공이었을까? 실패였을까? 흔히 말하는 '비변사 폐지', '서원철폐', '세도정치 종식', '군역 개혁(호포제)', '환곡 개선(사창)' 등은 성공요인으로 꼽고 있지만,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 발행'과 '원납전 실시'는 실패요인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보아야 할까? 아니다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일명 '쇄국'을 통해 '위정척사'를 실천한 그를 서구열강에 무릎을 꿇고 '통상수교'를 어쩔 수 없이 한 청과 일본과 대비하며 높이 평가하곤 한다. 물론 굴욕적인 전투 이후에 더욱더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과 '불리한 개항'을 하지 않은 것은 높이 살만 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에 벌어진 일들일 것이다. 서구열강과 '접촉'을 한 뒤에 나라 문을 꽁꽁 걸어잠근 것까지는 옳게 평가할 수 있더라도 적절한 '후속조처'가 마련되었어야 하는데, 대원군에게서는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대원군에게는 그저 '왕조국가'를 유지하는 것만이 최선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종의 친정(직접 다스림)'을 기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원군이 실각하고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면서 곧바로 이어진 것이 바로 '개항'이다. 이는 시의적절한 조처로 매우 잘 한 일이지만, 고종도 역시 어쩔 수 없는 '왕조국가의 국왕'일 뿐이었다. 세상물정을 너무도 모르는...

 

  암튼, '대원군의 실각'에 단단히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왕비 민씨'였다. 훗날 '명성황후' 추대된 당찬 여성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직접 고른 '며느리'가 자기 자신을 내쫓을 줄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나, 이게 어디 '왕비 민씨'의 탓일까? 왕조국가에서 권력은 '임금(고종)'에게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 '임금'이 성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임금'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당연하고 옳은 일이었다. 하지만 대원군은 자신의 실각의 원인으로 '며느리 탓'을 하고 말았으니, '또 다른 비극'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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