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50 , 읽은 쪽수 : 142쪽 ~ 175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3) 책 읽은 뒤 느낌
[ 19권 제4장 : 개항 ]
대원군이 실각을 하고 드디어 고종이 '친정'을 하였다. 중전의 공이 컸지만 고종은 아버지와 '대척점'에 서는 것을 꺼렸다. 조선 임금이 '불효'를 하면 광해군처럼 반정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일단은 대원군이 얌전히 계시는 것에 안도를 하였다. 허나 고종 스스로도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찾아가지 않았으니 신하들과 백성들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고종이 아버지에게 머리를 숙이면 아버지를 다시 '정치의 길'로 끌어들이는 셈이니 고종은 '대왕대비(효유대비)'에게 매일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효도를 다한다는 표시를 했다. 실제로 고종이 익종대왕(헌종의 아버지)의 아들로 입적하는 방식으로 보위에 올랐으니 '명분'상으로는 효도를 다하는 셈이다. 고종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셈이다. 홍길동처럼 상심하지는 않으면서 말이다.
한편, 고종이 친정을 하던 시기에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이 대두되는 등 실력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서구열강에 의한 '강제개항' 이후로 일본은 '탈아입구'라는 묘한 논리를 내세워 스스로 '동방의 서양 행세'를 똑부러지게 해내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은 '확 바뀐' 일본의 모양새를 보고 얼마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나 여전히 일본을 낮잡아 보고 있었다. 허나 '강화도 초지진'을 무단 공격하며 정치적, 군사적 압박을 가하는 일본 앞에서 아무런 대비와 대책도 없이 질질 끌려가는 모양새만 취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는데, '불평등 조약'이 되고 말았다. 조선이 '국제정세'에 밝지 못했던 까닭이다. 이를 두고 최익현은 상소를 올리며 '강화도 조약'을 맺으면 안 된다고 주청을 드렸으나 받지 않을 수 있는 '선택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애초부터 일본이 '군대'를 내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차하면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고종의 선택은 '조선의 모양새는 빠지지 않게, 일본이 원하는데도 체결'하는 것이었으나, 애초부터 일본은 조선과 '선린외교'를 할 생각이 없었던 탓에 조선은 발등에 불똥이 떨어지고 말았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발등에 떨어진 불똥을 뻔히 보고서도 뜨거운 줄 모른다는 것이었으니...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