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야밤 (22:00~24:00)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10 , 읽은 쪽수 : 50쪽 ~ 102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2장 : 1894, 갑오년 ]

  '갑오동학농민혁명'은 으레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로 시작한다고 알려졌다. 허나 조병갑은 단순한 횡포가 아니라 아주 악랄한 '수탈의 달인'이었다. 흔히 탐관오리들의 명대사를 "네 죄를 네가 알렸다"로 꼽지만, 조병갑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라 "네 죄는 정해졌고 너는 살고 싶으면 갖다 바쳐라"일 정도로 마른 오징어를 쥐어 짜서 물항아리를 가득 채우고야 마는 악질 중에 악질이었던 것이다. 이에 백성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면서 하나같이 전봉준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를 하니 결국 전봉준은 들고 일어섰다.

 

  전봉준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농민군을 이끌고 전주 감영으로 진격을 하려 했으나 멈칫 하고 말았다. 왜냐면 인근 고을에서 아무도 호응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병갑은 이미 도망을 쳐버린 상태고 농민군이 더는 호응을 하지 않으면 고립이 될 지경에 이르자, 전봉준은 손화중을 찾아가 호응해주길 바랐다. 때가 무르익었다는 전봉준의 말에 같이 봉기하자고 약속한 손화중이 봉기를 하고, 뒤이어 김개남도 봉기를 하니 농민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삼은 농민군은 '황토재'에서 처음 관군과 맞닥뜨렸지만 '수적 우세'를 앞세워 대승을 거두고 더욱 사기충천하였고, 그 기세로 밀어붙여서 '전주 감영'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농민군의 봉기로 '전주 감영'이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고종은 '청군 파병'을 요청한다. 리홍장과 위안스카이는 농민군을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파병 요청에 응했다. 그래서 '아산만'에 청군이 도착했는데, 이틀 뒤에는 일본군이 '공관과 자국민 보호'를 내세우며 '인천항'에 상륙했다. 원래 '텐진조약'의 내용이 조선에 상대국의 군대를 파견하면 자동으로 파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기에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지만, 일본군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 날'만을 기다려온 것처럼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리고 곧장 '경복궁'을 향한다.

 

  이에 '전주 감영'에서 대치중이던 '청, 관군 연합군'과 '농민군'은 <폐정개혁안>을 합의하며 서둘러 농민들을 해산하는데 주력했다. 왜냐면 '일본군'이 무력시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왜놈들이 조선에서 다시 설치는 꼴을 봐야했기에 일본군에게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조정은 당연한 수순으로 '농민군 해산' 직후에 '일본군 철수'를 주장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이에 조정은 청군에 부탁을 했고, 청군은 일본군에게 '공동 철수'를 주장했지만, 이 역시 거부했다. 다급해진 조정은 러시아, 미국, 영국 등에게 중재를 요청했지만 일본은 번번히 거부하면서 일본군 철수를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뻔뻔스럽게 청에 "두 나라가 같이 조선의 내란을 진압하고 내정개혁에 착수하자"고 요청했다. 이에 청은 "조선의 내전은 이미 평정되었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스스로 할 것이며 내정 간섭을 할 권한이 없다"고 분명히 했는데도, 일본은 조선에 "청국과 맺은 조약을 파기하고 청군을 철수시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증명하라. 3일 안에!!"라며 최후통첩을 날리며 남산에 대포를 설치해 궁궐을 겨냥하고 궁궐 앞에서 무력시위를 일삼았다. 조선이 대답이 없자, 3일 뒤, 새벽에 경복궁을 습격했는데, 일본은 고종을 협박해서 '청과 맺은 조약 파기'와 '청군 철수'를 문서로 받아내고서는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기습 공격을 받은 청은 패배하고 만다.

 

  그리고 일본은 '대원군'을 앞세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며 '김홍집 내각'을 움직여 '갑오개혁(갑오경장)'을 일사천리로 진행한다. '갑오개혁'은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이면서 '갑신정변'의 개혁안과 '농민군'의 폐정개혁안까지 일부 수용하는 등 근대화에 한 발을 내딛는 중요한 사안이건만, 일본군의 협박에 의해 강제로 설치된 '군국기무처'가 개혁을 주도하면서 상당히 '일본스러움'에 물들 수밖에 없는 개혁안이기도 했다. 허나 이런 일련의 소문들이 민간에 퍼지면서 '반일'과 '항일'에 대한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가기만 했다.

 

  이러한 일본의 '안하무인' 격인 태도에 농민군은 재봉기를 준비하였고, 평양성에 집결한 청군도 '2차전'을 준비했다. 여기에 일본군과 잠시 손을 잡았던 대원군이 일본에 의해 '들러리' 역할만 했다는 것을 깨닫고 남쪽으로 내려와 '농민군'과 손을 잡고 평양의 청군과 협력해 일본군을 상대하자고 협상을 제안하기에 이른다. 그런 와중에 '1차전'에서 패배한 청군이 북상하며 평양에서 합류하려고 했으나 '평택 부근'에서 일본군과 만나 크게 패배하고, 남은 병력이 평양에 도착하고, 응원군도 속속 평양에 집결했다. 남쪽에선 전봉준을 중심으로 다시 농민군이 재집결을 하며 일본군과 한 판 승부를 보려 했으나, 전봉준은 초기에 조심스런 행보를 한다. 왜냐면 농민군은 20만이라고 하는 '수적 우세'는 갖췄으나 군사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화력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봉준은 자신만을 '희망'으로 삼고 [반봉건, 반외세]를 외치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꿈꾸며 모여든 수많은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봉기를 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조선관군과 일본 연합군'이 '농민군'과 우금치에서 한 판 붙었지만, 전투는 '대량학살' 수준이었던 것이다. 대포와 기관총까지 갖춘 일본군에게 죽창과 사거리가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화승총으로 맞붙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맞붙은 '2차 청일전쟁'도 일본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한 농민군은 '해산'을 결정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 뒤 '황해도'에서 소년장수 '김구'가 용맹하게 싸웠다는 일화만 남긴 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집요한 추적으로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었던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이 차례로 잡혀 처형을 당하면서 끝나고 말았다. 2대 교주였던 최시중도 붙잡혀 처형을 당했기에 3대 교주인 손병희가 '동학'을 '천도교'로 바꾸어 대통을 이어갔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무엇보다 '반봉건', '반외세'를 주목해야 한다. 비록 혁명에는 실패했지만 '동학교도'와 '농민군'의 공동 목표가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위가 아닌 아래로부터 시작된 개혁이었기 때문에 조선민중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이 든든한 배경이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허나 이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분명한 노선을 갖추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며, 조선민중의 성원과 염원에 비해 열악한 준비도 또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정리하면, 반봉건을 외쳤으나 '왕조국가'를 완전히 대체할 새로운 국가 모델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반외세를 외쳤으나 외세의 무력을 극복할 힘을 갖추지 못한 점이 '실패 원인'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양반과 유생 들'이 '농민군'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는 것도 꼽을 수 있겠다. 조선을 지배했던 '계층'이 외세의 침략(일본군)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외세'보다 더 큰 위험이 '농민군'이라며 차별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시행'에 항거해 일어난 의병에 합류하고자 했던 '농민군 일부'를 동학교도에 가담했던 자들은 '천한 신분'이자 '위험인물'이라면서 의병 합류에 반대를 한 이들도 바로 이런 '양반 부류들'이었다. 아니 왜놈들과 싸우자면서 왜놈과 싸운 경험을 가진 이들을 환영하지는 못할지언정 '함께' 싸우기에는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내처버리니 한껏 오른 '항일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미련한 행보였던 것이다. 이처럼 '망국의 길'에 접어든 때에 합심하지 못하는 부류들이 있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