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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22:00~24:00)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1:30 ~ 22:10 , 읽은 쪽수 : 104쪽 ~ 171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3장 : 인아거일(引俄拒日) ]

  '인아거일'이란 아라사를 끌어들여 일본을 막는다는 뜻이다. 이는 '명성황후'의 책략이면서 동시에 '고종'의 뜻이기도 했다.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으로 인해 조선은 백성들의 봉기를 맞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끌어들인 외국군대로 인해 '남의 나라 전쟁'에 전쟁터가 되어 짓밟히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더구나 조선의 모든 것이 '일본'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판이 되자 일본을 막아내고 '친일세력' 또한 일거에 내쫓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와중에 '러시아의 힘'이 만만찮은 것을 보고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막는 일을 모색한다.

 

  다시 말하자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승리한 일본은 패배한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으며 다음과 같은 조항을 요구한다.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인하고, 요동, 대만, 팽호열도(대만 서쪽 섬들)를 일본에 할양하며, 일본에 2억 냥의 배상금을 지불한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조선에서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며, 청으로부터 할양 받은 땅과 배상금으로 엄청난 '전쟁 이득'을 얻으며 '또 다른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주도로 독일과 프랑스가 가세해 일본을 압박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삼국간섭'이다. 러시아는 아편전쟁 이후 '연해주'를 차지하면서 '만주'까지 넘보고 있었는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댓가로 '요동반도'까지 차지하려고 드니 러시아가 '실력행사'를 한 것이다. 이에 일본은 '청일전쟁'에 총력을 기울인 직후라 러시아와 상대하기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꼬랑지를 바로 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이 '문제'를 서구열강들과 함께 시시비비를 따지려는 쪽으로 가닥을 잡으려 했으나 열강들의 속셈이 제각각인 상황에서 '러시아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 했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계산이 서자 '삼국의 요구'를 수용해서 '요동반도'를 내놓는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된다. 사실 일본으로서는 요동을 토해내더라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허나 '자존심'이 깎기는 일임에는 분명했다.

 

  이를 감지한 '명성황후'는 곧바로 친일세력과 일본을 한꺼번에 내칠 상대로 '러시아'를 꼽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움직였다. 그러자 일본은 문인 출신인 이노우에 공사에서 군 장성 출신인 미우라 공사로 전격 교체를 한다. 그리고서 일본공사관을 중심으로 '일본 낭인들'이 집결하는 등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서는 대원군까지 포섭하여 일명 '여우사냥'을 감행한다. 여기서 '여우'는 다름 아닌 '명성황후'다. 그리고 궁궐에 침입해서 저항하는 조선 시위대와 궁인들을 닥치는대로 죽이면서 왕비를 찾았다. 그 과정중에서 고종과 왕세자까지 겁박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결국 일본 낭인들에게 거처를 들킨 왕비는 비명에 횡사하고 온몸이 칼로 난자되고 불에 태워져서 훗날 훈련대 장교 윤석우에 의해 발견되어 궁궐 옆에 묻히게 되었지만, 불에 태워지고 갈갈이 찢긴 상태여서 정작 누구의 시신인지조차 알지 못했다가 나중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에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발뺌을 하며 조선과 열강들의 추궁에 변명으로 일삼다가 살아남은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미우라 공사와 범인으로 몰인 낭인들을 일본으로 송환한 뒤에 재판을 하는 척하다가 '전원 석방'을 하며 사건을 일단락시켜 버렸다. 그러면서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사건'을 조선에서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심해진 탓에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으로 결론을 내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런 과정이 벌어지고 나서야 고종은 '명성황후'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을미사변'이 벌어진 지 3달 뒤였다.

 

  그런데 미우라 공사와 일본 낭인들의 '계획'과 '범행현장'에 흥선대원군은 왜 있었던 걸까? 10년 동안 '권력의 맛'을 보고 난 뒤에 정치적 일선에서 물러나야만 했던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욕' 때문에 '며느리'를 미워하게 된 듯 싶다. 차마 아들을 미워할 수는 없으니 모든 원인을 '며느리 탓'으로 하며 틈만 나면 '권력'을 되찾아 잘난 며느리를 혼내줄 생각만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임오군란' 때도, '청일전쟁' 때도, '동학농민혁명' 때도, 대원군은 자신을 권력의 자리로 돌려주겠다는 꼬임에 모두 홀랑 넘어가 실컷 이용만 당하는 신세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깨끗하게 인정하고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더 존경스런 어른으로 숭상 받을 수 있었으련만 '을미사변' 때에도 대원군은 미우라 공사에게 실컷 이용만 당하다 반 년도 못되어 며느리와 같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한편, 고종은 궐내에서 왕비가 처참히 죽은 일이 벌어지자 궁궐조차 안전하지 않다는 생각에 하루하루를 불안에 떨며 살아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감시'가 더 심해진 탓이다. 유일한 해방구는 '외국 공사'와 만나는 자리였다. 그래서 고종은 '춘생문 사건'을 벌여 미국공사관이나 러시아공사관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발각이 되는 바람에 실패로 끝장나고 말았다. 일본의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러시아 공사'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낸 결과, 일본의 감시망을 뚫고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바로 '아관파천'이다. 러시아는 처음엔 거부하는 모양새였다가 '전쟁'도 하지 않고 조선 안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큰 이점을 깨닫고는 적극적으로 도왔기에 할 수 있었다. 이로써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일국의 왕이 '외국의 힘'에 의지해 목숨을 부지하는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에 고종은 '초라함'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을 '황제국'으로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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