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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밤 (22:00~24:00)

1) 읽은 시간과 읽은 쪽수

 - 읽은 시간 : 22:00 ~ 22:40 , 읽은 쪽수 : 234쪽 ~ 268쪽

 

2) 읽은 책 이름과 책 검색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

박시백 글,그림
휴머니스트 | 2015년 06월

 

3) 책 읽은 뒤 느낌

  [ 20권 제5장 : 스러지는 자주국의 꿈 ]

  드디어 '러일전쟁'이 시작되려 한다. '대한제국 선포'를 하고서 황제로 우뚝 선 고종은 대내외에 '황실의 위엄'을 보이며 번듯한 나라를 만들려 했으나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며 번번히 자신의 의지를 꺾으려는 '독립협회'를 해산 하며 '전제군주'로 다시 회기하려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허나 '광무개혁' 등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학교를 세워 '계몽사업'에도 열을 올리며, 3만에 다다르는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등 '부국강병'한 나라로 거듭나려고 꽤나 노력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은 육군만 100만 군대를 양성한 때였기에 다른 서구열강과 비교할 처지가 못되는 형편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종은 '러시아'에 매달리다시피 했으며, 일본의 야욕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러시아'를 붙잡아두려고 꽤나 노력했다. 비단 러시아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여러 나라에 '이권 사업'을 넘기며 러브콜을 보냈고, '대한제국'이 굉장히 탐나는 나라라는 사실을 부각시키며 일본으로부터 보호받고 싶은 뉘앙스를 자꾸 풍겼다.

 

  허나 러시아는 '대한제국'보다는 '만주'에 더 관심이 컸다.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얻은 러시아는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를 건설해서 '시베리아 철도'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직선 개통되는 데 열을 올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화단 사건' 벌어지자 러시아는 열강들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데 공을 들였고,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고 난 뒤에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만주'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이에 영국과 미국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각각 일본과 조약을 맺었고, 이에 '한 판 승부'를 벌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이 서자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방법인 '선빵부터 날리고 선전포고하기'로 뤼순항에 집결한 러시아의 함대와 봉천으로 집결한 러시아 육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면서 '러일전쟁'의 승리에 한 발 나선다. 이후 흑해에서 출발해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동해로 가던 러시아 함대를 쥐어짜서 만든 일본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전멸시켜버리자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마무리 되었다.

 

  거대한 러시아가 조그만 일본에게 패배한 사실이 믿기 힘들지만, 마침맞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더는 전쟁을 할 여력이 없게 되자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을 맺고 서둘러 전쟁을 종식시켰다. 사실 일본은 '진짜' 전쟁을 더 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뒤를 도와주던 영국과 미국도 사실 러시아가 미워서 일본을 후원했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서 일본이 급부상하는 것도 마뜩찮았기 때문에 간당간당하게 도와줬을 뿐이다. 암튼 '러일전쟁' 직후에 일본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앞세워 '을사늑약'을 강제체결하고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간다. 이는 영국과 맺은 '제2차 영일동맹'과 미국과 맺은 '가쓰라 테프트 밀약'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확답받고 밀어붙인 결과다.

 

  이로써 고종은 일본의 보호를 강제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해버렸고, 고작 '을사늑약'의 문구를 고쳐서 '황실 보호'만 약조받은 셈이다. 그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국권피탈 이후 급격하게 '대한제국 황실'은 무너져 갔다. 또한 '을사늑약'의 강제체결에 두루뭉술한 발언으로 일관한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은 '을사오적'으로 낙인찍혀 두고두고 우리 국민들의 '처단대상 1호'가 되었지만, 정말이지 더럽게 살아남아 하나같이 천수를 누렸다. 반면에 '민영환'을 필두로 '이한응',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송병선' 등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자결로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했으며,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은 항일의병으로 격하게 반대를 이어갔다.

 

  허나 '을사오적' 등은 뻔뻔스럽게도 '을사늑약 체결'은 이미 이전부터 일본과 체결한 조약과 다를 바가 없는 내용이며, '외교권'만 잠시 일본에게 빌려주었다가 나라가 다시 부강해지면 다시 되찾아 오면 되는 일일 뿐인데, 많은 이들이 이를 오해하고 무조건 '일본을 미워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며 자신들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했다는 성명을 내놓는다.

 

  당시의 현실로 보아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를 거부한다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고종부터 대놓고 '반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던 터였다. '을사늑약' 직후에 고종이 의병활동을 음으로 양으로 돕고 있는 형편이었지만, 이미 기울어진 형세를 바로 잡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항일의병'이 실패로 끝맺자 지식인들이 주축이 되어 '자강운동'을 펼치게 된다. 실력적으로 일본을 앞설 수 없다면 '우리 실력'을 키워 이겨내자는 주장이다. 이는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주장인데, 이를 일본은 '동양평화론'이라고 포장하면서 "서구열강에 앞서 싸울 수 있는 아시아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청이 이미 멸망했고, 조선도 풍전등화에 놓여 있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마저 서양에 패배하게 된다면 아시아는 서구열강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 황인종은 단결해서 백인 침략자와 대항해야 한다. 동양평화를 위해서 말이다"라는 교묘한 말로 지식인들을 포섭해나갔고,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를 공공연히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만들어진 단체가 '일진회'다.

 

  '일진회'는 송병준이 이끌었는데 '일본군'의 후원을 받아 정치활동을 개시한다. 특히 러일전쟁 당시에도 물신양면으로 일본을 돕던 단체가 바로 '일진회'였다. 여기에 '진보회'가 합세한다. '진보회'는 3대 동학교주 손병희가 이용구를 통해 만든 조직이었는데, 원래 동학교도가 많았던 탓에 금새 거대조직으로 세를 불리게 된다. 이들은 '개화의지'를 불태우며 지식인 대열에 합류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가 회동을 하더니 합세해버렸다. 이에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는 '일진회'와 선을 긋고 '천도교'를 만드니 항일의병의 기치를 다시금 올리게 된다.

 

  이때 많이 만들어졌던 것이 바로 '신식학교'였다. 안창호의 대성학교, 이승훈의 오산학교, 이용익의 보성학교(난 '보성고'를 졸업했다. 고교시절에 숱하게 독립운동의 활약상을 들었음) 등이 잇달아 생겨나 1910년에는 2000개가 넘을 정도로 '교육열'이 엄청났다. 특히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배우는 것을 역점으로 두었다. 그리고 '신문 발행(대한매일신보 등)'과 '사회단체(신민회 등)'도 만들어지고, '대중운동'도 활발해졌다. 일본의 황무지 개간을 '보안회'가 막아냈고, 일본에 차관이 들어오자 '국채보상운동'도 펼쳐졌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일제의 집요한 탄압과 이간책으로 '자강운동의 한계'가 오래지 않아 드러나게 되었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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