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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습관 캠페인

1. 구매인증이력

징비록

유성룡(류성룡) 저/김흥식 역
서해문집 | 2014년 11월

 

2. 읽은 쪽수 : 154쪽 ~ 185쪽

 

3. 책 읽은 뒤 느낌

  명의 원군이 오자 조선은 반격을 준비했다. 원군이 먹을 군량과 말들에게 먹일 풀도 단단히 준비하고서 하루라도 빨리 왜적을 물리치길 바랐다. 명나라 군대도 초반에는 적극적이었다. 일본군의 기세가 무섭다는 우리 측의 조언도 무시할 정도로 시기충천이었다. 허나 딱 평양성 수복까지만이었다. 평양성을 손쉽게 수복하는 것 같더니 퇴각하는 일본군을 곧바로 추격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셈이다.

 

  물론 우리 측 실수도 있었다. 대동강 이남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라는 명을 받은 군대가 의견을 조율하지 못하고, 지레 겁을 먹은 장수와 공을 독차지하겠다고 독자행동을 한 장수가 따로 행동을 하면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만약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를 잡거나 그의 군대를 괴멸시켜버릴 수만 있었다면, 한양에서 머물고 있었던 우키타 히데이에라는 어린 장수 하나와 함경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만이 남았으니 기세가 오른 명군과 함께 각개격파를 하기만 했더라면 임진왜란도 그닥 큰 피해를 받지 않고 평정할 수 있었을 텐데, 머뭇거리는 명군과 손발이 맞지 않는 우리 군사들의 실책으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평양성에서 대패를 하고 남쪽으로 후퇴한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군대는 대열을 갖추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가 한양을 지날 때에는 한양의 백성들을 참혹하게 말살하고 식량과 무기가 될 만한 것도 모조리 불태워버리고 갔다. 조선군이 한양으로 되돌아오게 되면 조선에 이로운 일이 될 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한양에는 백성들의 시체가 길을 뒤덮을 지경이었단다. 죽은 어미의 젖을 빨며 울던 아이를 명나라 장수가 데리고 가 키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때 류성룡은 자신이 직접 본 상황을 <징비록>에 실으며 군대를 따라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백성들의 참상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명의 원군이 도착하고서 전황은 나아졌다. 권율 장군이 행주대첩에서 신승을 거둔 뒤에 조선 정부의 발언권도 세졌기 때문이다. 허나 여전히 명나라 군대는 머뭇거린다. 그러다 심유겸이 다시 돌아왔다. 류성룡은 그가 일본군 진영에 가서 무슨 내용으로 회담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행보가 탐탁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일본군에 갔다올 때마다 "조선땅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얼토당토 않은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말인즉슨, "강화회담이 진행중이나 양측의 다툼을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지만, 그 사이에 일본군은 왜성을 쌓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기 때문에 조선군으로서는 절대로 들어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급기야 부산 일대에 견고한 왜성을 쌓고 방어태세를 갖추고 나서는 지난 날의 복수를 하겠다며 '진주성'을 공격했다. 지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에게 대패를 하고 물러났던 것을 핑계 삼아 복수하겠다는 으름장을 내놓은 것이다. 명나라 군대는 이를 은근히 방조하는 모양새를 취했고, 조선군은 다급했지만 지켜야 할 곳은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라 '응원군'조차 보낼 여력이 없었다. 김시민 장군이 죽은 뒤에 진주 목사에 부임한 서예원과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남아 일본군을 막으려 했지만, 중과부적이었으며, 특히 서예원과 김천일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전투중에서도 지휘가 혼란스러웠으니 이래저래 어려운 상황이었다. 끝내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목사 서예원은 전투중에 전사했으며, 김천일과 최경회는 촉석루에서 몸을 던져 자결했다. 무너진 성벽으로 밀고 들어온 일본군은 진주 백성들은 남김없이 죽이며 임진왜란 이래 가장 참혹한 전투가 끝났다.

 

  이렇게 진주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부산으로 되돌아갔고, 명나라의 강화 통지를 받은 뒤에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예스블로그 독서습관 캠페인에 참여하며 쓴 포스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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