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첫 머리는 '실러'의 작품 가운데 <인질>이라는 제목의 시로 시작한다. 시칠리아의 참주 디오니시우스는 폭군이었다. 그래서 청년 다몬은 폭군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처형될 참이었다. 다몬은 죽기 전에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처형장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며 '친구의 목숨'을 담보로 걸었다. 그러자 폭군 디오니시우스는 묘한 조건을 내건다. "좋다. 누이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게 해주겠다. 만약, 네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친구를 너 대신 처형하고 네 죄는 묻지 않겠다"라고 말이다. 대놓고 도망을 치라고 권하는 조건이다. 하지만 다몬은 누이의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처형장을 향해 달렸고, 온갖 역경을 딛고서야 겨우 사형시간에 맞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친구를 살리고 자신이 대신 처형장에 올라갔다. 친구의 목숨을 살리고 자신이 죽겠다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디오니시우스는 다몬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둘의 우정에 '인간적인 감동'을 느껴 자신도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다는 내용으로 '실러의 시'는 마무리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연극'을 준비한다. 디오니시우스의 역할을 '자본가'에게 맡기고, 다몬과 친구 역할은 '노동자들'에게 맡겼다. 과연 이 연극에서도 '해피엔딩'의 결말로 마칠 수 있을까?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모습'에 감동한 자본가가 노동자들과 친구가 되는 결심을 하게 될까? 마르크스는 꽤나 회의적인 감상으로 이 연극을 관람했을 것 같다. 현실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해피엔딩'이라면서 말이다.
자본가들은 이윤을 얻어낼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잘도 찾아낸다. 자본가들은 하나를 내어줘도 두 개를 얻어내는 비법이라도 있는 걸까? 중세시대의 '영주와 농노 이야기'를 살펴보자. 농노는 일주일 중에 사흘은 '자신의 땅'을 개간하고, 또 다른 사흘은 '영주의 땅'을 개간하며, 주일엔 쉰다. 농노는 사흘간의 노동으로 '자신의 몫'을 챙기고, 사흘간의 세금을 치르는 '자유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영주가 농노의 땅을 강제몰수 해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중 6일을 일하게 만들고, 그 가운데 '사흘치 임금'을 주면서 나머지는 영주가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하루는 쉬게 해주고 말이다. 겉으로 봤을 땐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사흘치의 몫'을 챙기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느 엄청나게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민일 때는 '생산자'이지만, 땅을 몰수 당한 뒤에는 임금을 받는 '고용자'가 되어 버린 셈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유민일 때나 몰수 당한 뒤나 '세금'을 내는 의무는 같다. 여기서 또 차이점이 발생한다. 생산자일 때는 '사흘치의 몫'만큼 영주의 땅에서 일한 것으로 세금을 셈했기 때문에 '사흘치의 몫'은 온전히 자신의 몫이지만, 고용자일 때는 6일을 일하고서 3일치의 임금만 받았는데도, 그 '3일치 임금'에서 세금을 또 떼이게 되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또 있다. 생산자일 때는 영주가 세금만 받고 간섭을 하지 않았지만, 고용주일 때는 "내 덕에 먹고 사니 고마운줄 알아"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마르크스의 지적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자본가들도 노동자들에게 툭하면 하는 말이 있다. "내 덕에 먹고 사는 줄 알아. 내가 일자리를 만들지 않았으면 너희들이 어떻게 먹고 살 수 있었겠니. 그러니 고분고분 말 좀 잘 들으란 말이야. 파업 같은 거 할 생각하지 말고!"...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반대임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기업이 하루라도 제대로 돌아갈 수 있느냔 말이다. 업무가 멈추는 것은 물론, 공장의 기계도 헛돌 뿐일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눈치를 보며 쥐 죽은 듯이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하게 할 뿐이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이 발생한 것일까? 모두가 평등하다고 주장하고 평등한 관계에서 '합법적인 계약'을 했다고 하면서도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순간부터 '사용자'와 '고용자'는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계로 돌변하고 만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고용자'는 마음대로 사표도 낼 수 없다. 애초의 계약과는 다르다고 항변하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일만 한다. 부당한 처우를 받아도 그저 꾹 참고 버틴다. 왜냐면 이곳을 나가 다른 회사에 취직을 해도 마찬가지 푸대접을 받기 때문이다. 자본가들끼리 서로 '악덕'이 되자고 모종의 합의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자본가라는 계급이 되면 그냥 자동으로 착취를 할 줄 아는 스킬을 습득하게 되는 것일까?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와 노동자들 사이에 '해피엔딩'이 되기는 애저녁에 글러 먹었다.
그렇다면 자본가들은 어떻게 자본가가 되었을까? 태어날 때부터 자본을 두 손 가득 쥐고 태어나는 걸까? 그건 아니다. 그들도 애초엔 '없었다'. 그래서 악착같이 절약을 했다. 1세대 자본가들은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을 줄이는데 노력했다. 그렇게 돈을 모은 다음에는 자신이 '돈을 버는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한다. 이른바 '2세대 자본가'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도제'에게 대신 시키면서도 일(기술)을 가르친다고 생색을 냈다. 그래서 고용을 했음에도 임금을 주기보다 수업료를 챙겼다. 그렇게 돈을 벌고 또 번 셈이다. 그러다 어느 정도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 '돈이 돈을 벌어오는 구조'를 만들어서 돈이 알아서 모이도록 만든다. 그게 바로 '자본주의'다. 정확히 말하면 '자본이 돈(자본)을 벌어오는 시스템'이다. 이것이 바로 '3세대 자본가'의 완성형 모습이다.
이런 전통(?) 때문인지 자본가들은 '절약'이 몸에 베어 있다. 절약을 잘 했기 때문에 자본가가 될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절약은 노동자들이 아껴쓰는 것과는 다른 '절약'이다. 자본가들이 즐겨하는 '절약의 실체'는 바로 노동자들의 몫을 주어야 하는데도, 그 몫에서도 또 절약을 해서 빼앗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한 끼 식사(점심)'의 재료를 값싼 재료로 바꿔치기 하면서 '비용 절감'을 유도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의 자본가들이 영국 노동자들의 식사에 대해서 논평한 대목이 있다. "영국의 노동자들은 호화로운 식사를 한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더 값싼 재료를 절반만 먹고도 영국의 노동자들보다 곱절이나 더 생산을 해낸다(이책, 146쪽)"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무슨 빵까지 먹으려 하나. 귀리와 소금만으로도 배가 부를 텐데(이책, 146쪽)"라면서 자신의 불룩나온 배를 추켜올렸다고 한다. 이들이 피골이 상접한 노동자에게 한 말이라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심정이 들었다.
노동자들은 건강해야 한다. 자신의 유일한 '생산수단'이 맨몸뚱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잃는 순간 '생산도구'를 잃어버려 굶어죽는 수밖에 남지 않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건강을 잃으면 안 된다. 그런데 집도, 옷도, 먹을 것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아 늘 춥고 배고픈 이들이 '영국의 노동자'다. 이런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의 몫에서 더 많은 '절약'을 해야만 할까?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짓거리다.
암튼, 자본가들의 '자본축적'은 이와 같은 '근검절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미 노동자들의 '잉여생산'을 통해서 이윤을 챙긴 자본가들은 '자본을 재생산'하는 방법을 통해서 또 한 번의 '자본축적'을 시행한다. 돈이 돈을 벌어오는 시스템이라는 것이 이렇게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참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는 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