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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도서] 프랑켄슈타인

메리 셸리 저/오숙은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어릴 적에 읽었어야 마땅할 책인데 반백살이 되어가는 지금에야 뒤늦게 '문학책 읽기'에 빠져서 허겁지겁 닥치는대로 읽고 있는 중이다. 이 책도 그렇게 책꽂이 속에 푹 파묻혀 있다가 뒤늦게 내 손에 집힌 책인데 무려 20년이나 지난 책이다. 하긴 소설이 200여년 전에 쓰였는데, 고작 20년 지난 책을 읽는 것이 무슨 대수겠냐는 생각도 들지만 '분명히' 다른 점이 있긴 하다. 세월의 변화를 단박에 알아챌 수는 없지만, '뒤침(번역)'에도 유행이랄지 트랜드랄지..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인지 책마다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뒤친이(번역가)'의 역량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도 유행에 민감할진데 뒤칠 당시에 알게 모르게 유행하던 말투가 고스란히 담긴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오래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말이다.

 

  그게 그렇게 큰 차이가 있을까 싶지만, 요즘 아이들과 함께 '문학책'으로 논술 수업을 하다보니 그런 차이가 부쩍 눈에 띄곤 한다. 그래서 왜 그런 차이가 나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애들 책(새책)'과 '샘 책(낡은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뒤친 책의 '원본'이 서로 달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테면, 영국소설인 이 책의 원본이 '원작자'인 메리 셀리가 직접 쓴 것일 수도 있지만, 워낙 유명한 책인 탓에 '미국말로 뒤쳐진 책'을 원본으로 삼아 다시 '우리말'로 뒤쳐진 경우도 허다할 것이다. 더욱 복잡한 경우는 '어린이를 위한 축약된 책'인 경우인데, 이 경우엔 뒤침이에 의해 '각색'까지 더해져서 원작의 내용과 사뭇 다른책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만약, 여러 버전의 뒤침책을 '동시다발'적으로 읽지 않았다면 그런 차이를 모르고 지났을 것인데, 뒤늦게 이런 경험을 하다보니 왜 그토록  '같은 원작의 소설'이 다양한 출판사와 여러 뒤침이에 의해 출간되고 뒤쳐지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암튼, 책마다 '맛'이 색다르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니, '깜냥'이 될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맛'을 최대한 살려서 몇 자 적어보려 한다. 맛이 다르면 '느낌'도 달라지는 법이니 말이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면 '공포'라는 느낌은 그닥 들지 않곤 한다. 왜냐면 익히 알고 있는 '괴물'의 등장이 상당히 후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즘 트랜드에는 초반부에 등장해도 시원찮은 공포감이 들기 때문에 '시작'과 동시에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괴물이 선혈이 낭자한 장면을 꽉 채우곤 하기 때문에 소설의 중반부를 훌쩍 넘어갔는데도 사람만 죽고 정작 '원흉'인 괴물이 등장하질 않으니 지루한 감이 없지 않다. 난 이것을 두고 아이들에게 '고전명작의 아쉬움'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실제로도 아이들은 '찐 공포감'을 느끼지 못하고 밋밋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괴물 주인공'이 등장했는데도 공포감은 전혀 들지 않는다. 외모가 흉칙하기 이를데 없다는 '묘사'가 나오긴 하지만 동영상에 길들여진 요즘 아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인데다 어렵사리 등장한 괴물이 너무나도 '감상적인 복수'를 하고 '논리정연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으니 '공포감'은 싹 사라져버리기 일쑤란 얘기다. 이런데도 이 책을 '공포소설'이라고 소개해도 좋은 걸까?

 

  맞다. 이 책은 '공포소설'이 분명하다. 하지만 외면의 공포가 아닌 우리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공포가 불현듯 꺼내어졌기 때문에 '공포스러운 소설'이 된 것이라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할 뿐이다. 인간이 창조해낸 '생명체'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버린다는 '내면의 공포'와 맞닥뜨려야 제대로 된 찐 공포가 전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도 다름 아니라 인간의 '편리와 이기'를 위해서 발달해온 '과학'이 만들어낸 공포이기 때문에 정말 무시무시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공포감'이 들지 않는다면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그리고 인간이 행한 모든 행동과 활동이 '도리어' 인간을 비롯해서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위협하고, 심지어 지구마저도 파괴해버리는 공포를 말이다.

 

  '과학의 발달사'를 조금만 살펴보면 '안전'하다고, '무해'하다고 만들어서 '유익'하게 써오다가, 어느날 갑자기 '공포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들이 한둘이 아닐 게다. '가습기살균제'는 어떤가? 갓 태어난 아기와 사랑스런 아내를 위해서 아빠는 '가습기'에 낀 곰팡이를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퇴근길에 '가습기살균제'를 사왔다. 그리고 아내가 맛있게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에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들어가 '가습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물때를 제거한 뒤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청결'하게 하기 위해 소중히 사가지고 온 '가습기살균제'를 넣고 가습기를 켠다. 얼마나 애정이 넘치는 상황인가. 그런 아빠의 애정을 듬뿍 받은 아기와 육아휴직으로 집에 머물고 있는 아내가 '가습기살균제'의 직격탄을 맞고 '중증호흡기장애'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사망을 하게 되었다. 이제 좀 공포감이 드는가?

 

  프랑켄슈타인 박사도 단순히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화학을 연구했다. 얼마나 심취했는지 오랜 옛날의 과학자인 '연금술사의 비법'까지 손을 대면서 열중을 했더랬다. 비록 대학교수는 '하릴없는 옛 지식'까지 들춰 대는 프랑켄슈타인을 비아냥거리며 '시간낭비'라고 핀잔을 주었지만, 프랑켄슈타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더욱더 학문에 빠져들면서 놀라운 성과를 냈다. 바로 '죽은 시체'에 전기를 흘려보내면 다시 살아날 수 있게 만드는 놀라운 비법을 알아낸 것이다. 더욱이 그는 '인간'보다 더 크고 힘도 쎈 것을 만들기에 성공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연구에 성공하고보니 자신이 만든 '새 생명체'가 보기만해도 역겹고 혐오감이 들 정도로 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살아서 꿈틀대기 전에는 느껴지지 않던 혐오감이 괴물에 '생명'을 불어넣어주자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창조주'인데도 너무도 혐오스럽고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며 갓 태어난 '생명체'를 그대로 방치한 채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온갖 저주를 퍼부으면서 말이다.

 

  사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빨리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까지는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하지만 잘못을 깨닫기만 하고 사태를 수습하는데에는 소홀했던 점이 크나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 괴물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의 창조주인 프랑켄슈타인의 가족과 친구, 지인들을 말이다. 그렇게 괴물은 복수심에 차서 살인을 저질렀고,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지는 '살인사건'을 마주하면서 더욱 심한 공포감에 젖어들게 된다. 바로 이 '공포'가 <프랑켄슈타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범인이 누구인지 뻔히 아는데도 범죄를 막을 수도 없고, 범죄를 밝힐 수도 없는 '주인공'이 겪는 공포 말이다.

 

  하지만 괴물이 처음부터 무시무시한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다. '성선설'을 증명하기라도 할 것인냥 갓 태어난(?) 괴물은 착한 본성을 지녔었기 때문이다. 다만, 인간과 달리 너무나도 혐오스런 외모를 가진 탓에 '선한' 인간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태어나자마자 버림을 받았다는 충격을 나중에 새삼 깨닫게 되면서 '증오'를 배우게 되었고, 믿었던 사람에게마저 '배신'을 당하면서 그 무엇보다 처절한 '복수의 화신'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것은 '괴물의 탓'일까? 분명 살인을 저지르는 괴물의 죄를 용서할 수는 없겠지만, 애초에 사랑을 받고 '인간답게' 살 수 있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지 않을까 싶어서, 괴물에게 '동정심'이 가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끝내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을 찾아가 '복수'와 '살인'을 멈추고 싶다면서 '제안'을 내놓는다. 자신과 똑같은 '여자'를 만들어주면 인간들이 사는 세상을 떠나 '남미'에 정착하겠다고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남미'에도 엄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데 뭔소린고 싶지만, 19세기 제국주의시절의 감성이 충만한 '막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시 '대영제국'이 식민지 원주민들을 '사람취급'도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한다면 '괴물'이 살아갈 장소로 적당한 곳이기 때문이다. 여튼, 비판적인 읽기를 해야 할 부분이지만, 잠시 고정을 하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그럴듯한 제안에 이끌려 '살인'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다짐을 믿고 '여자 괴물'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또 다른 공포'가 찾아오면서 막바지에 들어간 작업(?)을 멈추고 애써 만든 '여자 괴물'을 망가뜨려버린다. 왜냐면 괴물 종족이 번식(!)을 해서 더욱더 늘어날 것이라는 '새로운 공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유전자 상식'으로 생각해보면, 애초에 인간의 죽은 시체에서 얻은 조각을 이어붙여서 '부활'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여자 괴물'을 따로 만들 필요도 없이 '여자 인간'과 사랑(?)에 빠지게 되면 될 것이라 '프랑켄슈타인의 고민'은 쓸데없는...이치에도 맞지 않는 고민이었으나, 19세기 '유전학'이 발달하기 전의 소설인 것을 감안하면서 읽어보면, 제법 고민해볼 만한 '공포감'이었을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켄슈타인은 또 다시 '가까운 이'들의 죽음을 겪게 되고 만다. 이로써 프랑켄슈타인과 괴물 사이의 쫓고 쫓기는(?) 대단원의 막이 열리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권리'로써 괴물을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괴물은 '할 수 있으면 해봐라'면서 흥미진진한 대결을 벌이게 된다.

 

  소설의 줄거리와는 별개로,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에 대해 수많은 고찰을 하곤 한다. '과학만능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읽기도 하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심각한 고민도 해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 '과학자의 윤리의식'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될 연구를 끝까지 하거나, 지적 호기심만 충족하고서 책임은 지지 않는 비양심적인 행태가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의 이기는 대단한 업적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로 인한 폐해에도 무한한 책임을 져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전쟁을 빨리 종식시키겠다는 일념으로 '핵무기'를 만드는데 성공한 인류는 '엄청난 파괴력'에만 주의를 기울였을 뿐, '방사능'이라는 위험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써'보고 나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이런 어리석음이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서도 왜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 것일까? 예상하지 못했다는 '변명'만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항생제의 남용'도 마찬가지다. 수퍼박테리아가 등장할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까? 아니, 예상은 둘째치고, 기존의 항생제가 소용 없어지면 '더 강한 항생제'를 개발하려들고, 그도 소용없어지면 '더 쎈 항생제'를 만들 궁리부터하는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이미 만들어진 무기로도 엄청난 살상력을 갖추고 있건만 '기어코' 더 쎈 무기를 만들어 모두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나서야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 괘씸하단 말이다.

 

  이런 비판을 우리는 <프랑켄슈타인>을 통해서도 할 수 있다. '과학'이라는 마법사의 돌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이 끝내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흉칙한 괴물을 만들고야 마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공할만 한 물건에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붙이곤 한다. 끔찍하기 이를데 없는 괴물의 대명사로 말이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프랑켄슈타인을 만들고 또 만들고 있다. 처음엔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조금 뒤엔 '인간만을 위한 편리함'을 만끽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끝에는 '애초에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고 있다.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인 때문일까? 여기까지 '죽음을 부르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었다. 조만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괴물의 이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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