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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의 꼽추

[도서] 노트르담의 꼽추

빅토르 위고 글/권태문 편

내용 평점 4점

구성 평점 4점

  나 어릴 적만해도 '명작소설'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해서 보여주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빨간머리 앤>도 소설보다 애니를 통해 보았고, <알프스 소녀 하이디>, <엄마 찾아 삼만리>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명작을 '애니'로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그런 애니들이 보통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본애니'이기도 했지만, 미국과 유럽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도 꽤나 많이 볼 수 있었다. <샬롯의 거미줄>, <동물농장>, 그리고 <노틀담의 꼽추>도 '원작소설'이 있는 줄도 모르고 애니메이션으로 먼저 접했던 셈이다.

 

  물론, 어릴 적에는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그저 보고만 있었다. 왜냐면 그 당시만해도 어른들은 '만화'를 보면 무작정 혼을 내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하긴 당시의 어른들도 '명작소설'을 즐길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은 별로 없었을 때이니,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만화'나 보고 있는 자녀를 한심하게 여기곤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보는 눈'은 있는지라 당신께서도 난생 처음 봤을 '명작 애니메이션'의 내용에 곧 빠져들면서 혼을 내는 것도 잊으시고 아들과 함께 끝까지 시청하곤 하셨다. 비록 만화지만 내용이 상당히 깊다면서 말이다. 바로 이 <노틀담의 꼽추>도 내 아버님께서 끝까지 시청하셨던 몇 안 되는 애니메이션이셨다. 특히 '숙명'이라는 메시지로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대작에 "훌륭하네"라는 단 한 마디로 감상평을 마무리하셨던 것을 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 책을 다시 읽으니, 주제가 참으로 묘했다. 과연 무엇을 두고 '숙명'이라고 위고는 가리킨 것일까? 숙명의 사전적 의미는 '날 때부터 타고난 운명'이라고 한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란 뜻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이 책의 주인공는 다름 아니라 '콰지모도'다. 날 때부터 꼽추라는 불구의 몸으로 모두에게 버림을 받고 죽을 운명이었으나 클로드 부주교 덕분에 죽을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성당의 종지기를 어릴 적부터 한 탓에 귀머거리가 되어 불구의 몸에 장애까지 갖게 되었다. 그래도 콰지모도는 클로드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은혜를 갚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다 할 충직한 하인으로 행세하며 살고 있었다. 과연 '콰지모도'에게 주어진 숙명이란 무엇일까?

 

  이 책의 여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에스메달다'다. 이름부터 에메랄드를 연상시키는 보석같이 아름답게 빛나는 미모의 주인공은 애석하게도 천하디 천한 '집시여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드리는 탬버린 장단에 춤을 출 때면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황홀한 듯 그녀의 춤과 음악이 끝날 때까지 눈을 뗄 줄 모르곤 한다. 심지어 모두가 존경해 마지 않는 클로드 부주교까지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믿음으로 숭고한 신앙심을 가졌기에 세속적인 욕심에 불과한 '여인과의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금욕의 수도승'이 단 한 번의 마주침으로 그만 불 같은 사랑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늙은 부주교와 어린 소녀의 사랑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조합이렸다. 이래저래 맺어질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런데도 '피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으니, 이것을 두고 '숙명'이라고 말한 것일까?

 

  한편, 에스메랄다는 소녀의 감성으로 풋풋한 사랑에 빠지고 만다. 상대는 바로 근위대장으로 등장하는 펠뷔스다. 그녀는 콰지모도에게 납치되는 도중에 펠뷔스의 도움으로 구출되는 순간에 듬직하고 멋진 외모의 '구원자'에게 한순간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백마 탄 왕자님이라도 등장한 듯한 감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에스메랄다가 첫 눈에 빠져버린 사랑의 감정을 누구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순진한 소녀의 사랑을 짓밟아버리고 마는 펠뷔스를 두고서는 누구라도 손가락질을 할 것이다. 펠뷔스는 아름다운 에스메랄다와 연애질을 하지만, 그녀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자마자 '귀족처녀'에게로 홀랑 달아나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스메랄다는 '첫사랑'인 펠뷔스에게 헤어나질 못하고 순진무구한 사랑을 계속 하려 애쓴다. 이조차 '숙명적인 첫사랑'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책에서 '진정한 사랑'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클로드 부주교의 사랑을 말할 것도 없고, 에스메랄다의 철부지 사랑도 곱다시하게 보이질 않으며, 펠뷔스의 사랑은 썩은내가 풀풀 풍길 정도로 속물적인 사랑일 뿐이다. 다만,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보답으로 자신의 목숨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사랑'을 보여주는 콰지모도만이 사랑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듯 싶다. 허나 이조차 '짝사랑'에 불과하다. 콰지모도는 형틀에 묶여 죽을 위기에 쳐했을 때 자신에게 물을 건내주며 생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해준 에스메랄다에게 보답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지만, 성당의 탑꼭대기에서 그녀를 몰래 도와줄 적에는 난생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흉칙한 겉모습을 보일 용기가 없기에 '사랑고백'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다. 더구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콰지모도보다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딴 여자의 품에 뛰어든 펠뷔스를 끝까지 갈구하는 에스메랄다는 콰지모도의 순수한 사랑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 그러니 이 둘도 서로 사랑할 수 없는 사이인 것이다. 설마, 이것도 '이미 정해진대로 따라야 하는' 숙명의 일부란 말인가?

 

  이래저래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하나씩 죽음을 맞이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한 이는 단 하나도 없다. 다만, 부적절한 사랑의 군상속에서 '딱 하나'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싶었던 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사랑은 뼛조각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마도 죽어가는 연인을 품에 안고서 깊은 잠에 빠지듯 생을 마친 듯한 '마지막 장면'이 이 소설의 하이라이트일 것이고, 살아서는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이지만 '죽음'으로도 갈라놓을 수 없다는 마지막 결의가 돋보이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뼛조각조차 다른 이들의 느닷없는 방문과 함께 바람결에 사그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텅진 자리에 남겨진 글귀가 바로 '숙명'이란 두 글자였다. 마치 '그 누구도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점지해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위고는 왜 이처럼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써놓은 것일까?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끔 숙명을 정해놓은 까닭이 무어냔 말이다. 아무래도 '시대적 배경'에서 찾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때는 바야흐로 15세기 중세유럽이다. 아직 본격적인 '마녀사냥'이 펼쳐진 시기보다는 앞선 시대배경이지만,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왕의 권력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지만 백성들의 삶은 팍팍할 정도로 힘들기만 했다. 이런 백성들은 존경해 마지 않는 교황과 절대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지만, 이미 교황과 군주는 '저들의 욕심'에만 관심이 있을 뿐, 백성들의 삶에는 하등 관심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렇게 힘든 삶에 '희극적인 요소'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중세의 무거운 분위기는 엄숙하고 경건함만을 요구할 뿐, 불경이라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웃음소리조차 허용하지 않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위고는 이 책에서 '시작부터 끝까지' 유머와 해학, 그리고 풍자를 담았다. 평소에는 존경하다못해 감히 얼굴조차 볼 수 없던 고관대작들이 책 속에서는 '우스개의 대상'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백미는 단연코 '바보교황'으로 뽑힌 콰지모도다. 생김새가 가장 우스운 사람을 골라 '하룻밤의 교황'으로 삼아 유쾌한 난장을 벌이다니 말이다. 재판장은 또 어떻고 말인가. 공정하고 엄정해야 할 재판에 '귀머거리 콰지모도'가 주인공이 되어 한바탕 웃음잔치를 벌이며 배꼽을 쏙 빼놓고 만다. 더구나 신성한 직함인 부주교 신분으로 '욕정의 화신'이 되어 에스메랄다에게 매달리다 못해 납치와 감금, 그리고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 국왕이라는 작자는 또 어떻고 말인가. 거지떼들이 신성한 장소인 성당을 공격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인파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체면'이 손상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 무참한 폭력을 일삼고 마니...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핍박 받고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비록 이야기속에서나마 '저들의 횡포'에 유머로 저항할 수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소설의 내용을 비극으로 끝맺은 것은 '그리스비극'에서 말하는 '카타르시스(정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도 비극적인 장면을 보면서 슬픔을 쏟아내고 난 뒤의 '개운함'을 얻을 수 있고, 극 속의 등장인물들이 겪는 비극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저 정도로 비참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라는 맘을 품을 수 있다는 '비극의 긍정적 효과'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위고는 등장인물들의 '새드엔딩'이 독자들에게 미칠 '해피엔딩' 효과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들의 숙명적인 사랑이 모두 비극으로 끝맺음을 보고, 당시 독자들은 소소하나마 '자신만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으리라고 짐작이 된다.

 

  역시나 대작은 '한 번의 독서'로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다시 읽고 새로운 감상을 느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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