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섬에 산다. 결혼도 했다. 하지만 아내도 자식도 없이 혼자 산다. 아내는 오래 전에 죽었고, 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다. 한때는 잘 나가던 의사였지만 지금은 은퇴하고 이렇게 외딴섬에서 홀로 지낸다. 아니 완전하게 홀로 지내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늙은 것만큼이나 늙어버린 개와 고양이와 함께 산다.
이 섬에 찾아오는 이라고는 의사에서 은퇴해버린 주인공을 주치의라고 일방적으로 여겨버리는 살짝 무뢰하기짝이 없는 우편배달부 뿐이다. 외부와는 달리 연락할 까닭조차 없이 홀로 사는 남자이기에 찾아올 이도 없고, 편지도 보내줄 리 만무하지만 그래도 뻔질나게 찾아오며 일방적으로 말벗이라도 해주니 고맙지 않냐고 소탈하게 웃을 때는 얄미울 정도다. 더구나 조금이라도 아픈 곳이 있으면 큰 병은 아니냐며 집요하게 물어보며 진료를 해달라고 요구하는 통에 귀찮을 지경이다. 그래도 남자는 이런 그가 떠나고 나면 자기 삶을 평화롭게 해주는 적막함이 찾아오기 때문에 잠시만 참으면 그 뿐이다.
이런 그에게 40여 년 전에 떠났던 애인이 찾아왔다. 그녀가 떠난 게 아니라 자기가 떠나버려서 다시 찾아오기도 민망하여서 찾지 않고 있었는데, 그녀가 남자를 찾아왔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든 몸으로 헤어지기 전에 남자가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한 <연못>이 보고 싶어서 찾아왔다며 함께 가자고 한다. 남자의 <평화>롭던 삶에 금이 생겼다.
그녀와 남자는 연못으로 향하고 연못에 도착해서는 돌아오던 길에 그녀는 딸을 만나러 가자고 한다. 남자는 직감한다. 그녀와 자기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것을. 직감은 사실로 확인되고 남자는 그녀에게 가볍게 책망하듯 물어본다. 왜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냐고. 만약 그랬다면 내 삶은 달라질 수도 있었다고. <무엇이>...
남자는 갑자기 찾아온 그녀와 딸을 잠시 떠나 자신이 섬에 갇히듯 살게 된 <이유>를 찾아가려 한다. 그 이유는 실수였다. 그러나 남자는 의사였고, 의사의 실수는 또 다른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남자는 그 실수로 한 여자의 삶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다. 유망한 수영선수의 멀쩡한 팔을 절단하였다...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남자는 자신이 분명히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용서 받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섬에 갇히듯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듯 했다. 물론 온전히 그것 때문에 섬에 사는 것은 아니겠지만...
남자가 찾아간 <실수>는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로 방황도 했고 각종 신(神)도 찾아다녔지만 결국 봉사하는 삶만이 자신의 아픔을 달래준다는 사실을 깨우치고서 그렇게 살고 있었다. 그 실수는 남자를 무덤덤히 맞이한다. 용서? 그건 이미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유통기한이 지나고 지나 이미 폐기처분된 감정이었다. 실수는 새 삶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살짝 의아해한다. 자신의 예상밖의 상황에...
남자는 홀로 섬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미 <무엇>인가 달라졌다. 남자의 삶에는 다시 여자가 생겼다. 아내처럼 살았던 옛 연인이 다시 찾아왔고, 생전에는 없을 것으로만 알았던 딸이 생겼으며, 실수로 간직되어 마음의 짐이 되었던 여자도 이젠 더이상 짐이 아니었다. 그리고...또 한 여자가 찾아와 남자에게 <죽음>을 선물하였다.
그 죽음을 선물한 여자는 실수가 데리고 있던 여자아이였다. 남자와 첫만남 때부터 일본도를 들이밀며 위협을 하던 여자였다. 이 얘긴 빼자. <죽음>은 그 이후로 계속 이어지니...난 죽음을 태연히 이야기하기에는 아직 젊은 나이다. 너무...
이 책은 외롭다. 한 남자가 섬에 홀로 산다는 것도 외롭고,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여자가 옛 연인을 찾아와 오래된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는 것도 외롭고, 평생 자식이라고는 없는 줄 알고 지내다가 그 딸이 훌쩍 커버리고서야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상황 자체가 엄청 외롭다. 갓난아기 때 기저귀를 갈아본 적도 없고, 배냇짓하는 것도, 어리광을 피는 모습도 남자의 기억 속에선 없다. 이 모든 것이 남자를 외롭게 하고, 독자들도 외롭게 한다. 적어도 나는 너무 외롭게 읽었다.
산다는 게 그렇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래도 외롭고 싶지 않다. 사랑받고 싶고, 사랑하고 싶다. 싸우는 나날들이라고 할지라도 안 싸우는 나날들만 가득한 밋밋한 삶은 더이상 노땡큐다. 그렇지만 살다보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외로움에 휩싸여 살아갈 때가 있다. 그럴 때 순간순간 찾아오는 <무엇>이 외로움을 떨쳐낼 수 있는 시작이 된다.
이 남자가 사는 집 방 한켠에는 <개미집>이 있다. 집 안에 개미집이 자라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아스럽지만, 이 개미집이 그 남자의 <외로움>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개미집을 치우는 날이 바로 외로움을 떨쳐버리는 날이 될 것이다.
또 하나의 상징을 언급하자면, 바로 제목이다. 제목이 <이탈리아 구두>인데, 도대체가 이 책에서는 구두에 대한 언급이 별로 없다. 그래도 찾아본다면 이 남자의 아버지가 늘 하던 말 가운데, '식당을 평가하는 방법 가운데 웨이터의 구두를 살펴본다'는 것이나, 그 남자의 딸이 '굽이 높고 빨간 하이힐을 고집한다'는 것,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 와서야 도착한 1년 전에 주문했던 <이탈리아 장인이 한땀한땀 수을 놓듯 정성을 들인 수제 구두>의 등장이 전부이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일까? 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구두를 <멋지게> 신을 필요도 없고 <깨끗하게> 닦을 필요도 없다. 그저 <편한> 슬리퍼나 운동화 정도면 충분하다. 그래서 이 책에서 <구두>가 등장하는 까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척도>가 되기 때문일 게다. 아버지의 구두처럼 구두는 사람이나 장소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도 하며, 딸의 구두처럼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느 정도 필요한 고집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맞춤 구두>처럼 편한 구두를 신었을 때만큼 만족스러운 삶은 없다. 이 구두를 남자에게 선물한 이들은 바로 그녀와 딸이었다는 것이 편한 구두을 선물한 의미를 더욱 증폭시킨다. 이 세상에서 가족만큼 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그런 편한 구두를 삶의 끝자락에 와서야 신을 수 있다는 것이 외롭고, 비록 끝자락이지만 신을 수 있다는 것이 삶의 또 다른 행복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