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00>을 기억하는가?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고작 300명의 결사대로 막아낸 '테르모필라이 전투'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말이다.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에서 볼 수 있다. 늘 올림픽 피날레를 장식하는 마라톤 경주가 유래되었다는 '마라톤 전투'와 세계 4대 해전에 꼽히는 '살라미스 해전'도 역시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제국 페르시아와 신흥 강국 그리스가 맞붙어 마침내 그리스가 승리를 거두게 되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역사책이 바로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란 책이다.
흔히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쓰여진다'는 말처럼 그리스 사람인 헤로도토스가 오리엔트를 통일한 강대국 페르시아를 무찌른 용맹한 그리스인을 그려 <역사>에 고스란히 기록하여 남겨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헤로도토스 덕분에 2500여 년전 일을 상세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헤로도토스가 남긴 <역사>를 모두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과학적 사실과는 전혀 무관한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써놓기도 하였고, 균형잡힌 역사가의 관점이라고는 볼 수 없는 신화나 신탁, 계시 등과 같은 내용에 근거하여 역사를 서술하곤 하여 '헤로도토스는 사기꾼에 가깝다'는 비난조차 듣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사람이 그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수집하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을 거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 오류는 눈 감아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반면에 2500여 년 전에 그리스 전역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두 발로 오가며 모은 '이야기'와 '사료'를 근거 삼아 9권이라는 방대한 내용으로 집대성한 공로를 먼저 치하해야 마땅할 것이다. 비행기는커녕 기차나 자동차도 없던 시절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그였기에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책의 내용은 크게 보아 '페르시아의 탄생'으로 시작하여 '페르시아 전쟁'으로 마무리 하였다. 메디아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가 어찌하여 속국에서 벗어나 주변국을 무찔러 정복하고, 이집트까지 점령하여 오리엔트 최대 제국으로 성장하였는지 아주 상세하게 보여준다. 단지 역사적인 관점에서만 서술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지리적인 설명이라든지, 인종적, 민속적인 점까지 곁들여서 설명하여 그 방대한 내용을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단순히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는 형식으로 쓴 것이 아니라 헤로도토스가 직접 가보고서 '확인'한 뒤에 비로소 <역사>책에 그 내용을 담았기에 더할나위 없이 소중한 '사료'가 된 것이다.
만약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없었다면,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속에서 서술된 '트로이 전쟁'을 한낱 '신화'로 기억되었던 것처럼 '마라톤 전투'나 '300',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까지 모두 신화로 낮잡아보았을 것이다.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란 말인가? 오리엔트를 평정한 다리우스왕이 이끈 수십 만 대군을 고작 300명으로 막아냈다는 이야기를 쉽게 믿을 수 있더란 말이냐. 또 살라미스 해전은 어떤가. 숫자만 따지고 보면 믿을 수 없는 결과이긴 '테르모필라이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페르시아에 절대 약세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가 패배하였으나 이야기 속에서라도 이겨보고 싶었었다고 잘못된 해석이 오래도록 진실로 알려졌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트로이 전쟁'이 바로 그런 격이었다. 호메로스가 대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에 그리스와 트로이 간의 전쟁을 낱낱이 그려놓았으나 근거 하나 없이 '신화'로 그려놓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역사'로 대접받지 못하고 '신화'로 알려지지 않았느냔 말이다. 만일 하인리히 슐레만의 업적이 없었다면 여전히 '트로이 전쟁'은 신화나 전설 속에 묻혀버렸을 터였다. 그런데 '페르시아 전쟁'은 헤로도토스가 '역사가의 관점'으로 낱낱히 밝혀냈기에 일찌감치 '역사'로 자리잡을 수 있었고, 그뒤에 많은 사가들의 귀감이 되어 '역사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게다.
한편 그리스 사람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도 그리스 역사의 내용보다 페르시아 역사의 내용이 더 많이 실렸다. 이는 그만큼 대제국 페르시아의 위용을 크게함으로써 당시에 변방에 불과했던 그리스가 끝내 승리를 거둔 장면을 더욱 부각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그렇다고 헤로도토스가 상당한 연출가 기질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경우에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이 딱 어울릴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그리스가 거둔 기적같은 승리를 통해 어마어마한 자긍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마치 우리 나라가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써냈을 때 느꼈던 기쁨을 만끽하며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후세에도 길이 남을 자랑스런 그리스의 기록을 남기는 일에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잠시 딴소리를 좀 하자면,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다 지나간 과거의 일들을 왜 배워야 하느냐는 질문을 하거나 받곤 하는데, 자기 나라의 자랑스런 역사를 보면서 느끼는 뿌듯함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배운다고 답변을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반대의 역사 장면을 배울 때는 역효과가 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사실을 통해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비추고, 다가올 미래를 현명히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E. H. 카는 이를 두고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가 나누는 끊임없는 대화"라며 역사를 전문가가 다루는 영역으로 한정하고, 그들의 해석 속에서 '진정한 역사'를 언급할 수 있다고도 하였으나 일반 독서가인 사람들에게는 그닥 해당사항이 없는 해석일 따름이다.
어느덧 역사는 '교양인'의 필수과목이 되었다. 전문가들만이 나불대던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교양을 갖춘 일반인도 얼마든지 역사를 논할 수 있고, 나름대로 해석하여 교훈을 얻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전문가들조차 '역사 속 단 하나의 사건'을 두고 첨예한 해석을 내놓기 일쑤다. 물론 그 전문가들은 실증할 수 있는 근거를 두고서 내놓은 해석이다. 그러나 일반 교양인들은 바로 그런 '실증(實證)' 덕분에 역사에 싫증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비전문가인 교양인들이 내놓은 '역사적 해석(교훈)'이 역사를 더욱 대중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헤로도토스가 <역사>를 쓴 까닭을 짐작하며 이 책을 읽어본 결과, 그리스 사람인 헤로도토스가 후세 그리스 사람들을 비롯해서 온누리 사람들에게 '자랑스런 그리스'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다. 이를 두고 훗날 유럽사람들은 자신들의 서양문명이 오리엔트가 아니라 헬라스(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었고, 이를 강조해서 오늘날 서구문명의 자부심을 드높일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해석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동양사람인 우리는 이 책을 어찌 해석해야 할까? 대~한민국 사람인 우리는 또 이 책을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쏟아질 법하다. 정답은 없다. 전문가인 역사가들이야 '싫증'이 날 정도로 '실증'을 해대겠지만 비전문가인 교양인들이야 '싫증'나게 읽어댈 필요가 없다.
이 책을 통해 동양사람들은 한 사람의 훌륭한 독재자에게 다스림을 받으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반면에 서양사람들은 독재자가 다스리는 것보다는 혼란스럽지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서로의 불만을 줄여나가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리우스나 크세르크세스는 주변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관대함'을 내세워 각 민족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포용하여 점점 세력을 넓혀갔으나 그리스의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나라들은 그런 '관대함'에 포용되기보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 죽는 것을 선택하였고, 그것이 마침내 승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게다. 그 뿐인가. 그리스사람들의 불굴의 의지와 크세르크세스의 철두철미한 계획과 단호한 결단력을 엿보며 배울 점이라고 꼽을 수도 있을 게다. 역사를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일 게다. 그만큼 방대한 것일 테고.
역사는 결코 쉬운 학문이 아니다. 그러나 어렵게만 볼 학문도 아니다. 학창시절에 역사라면 치를 떨던 사람들이 뒤늦게 사극드라마와 역사소설에 빠져 역사의 재미를 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요즘이다. 그와 더불어 관련 역사책도 불티나게 팔리고 읽히는 때다. 마찬가지로 <역사>도 결코 만만히 볼 책은 아니다. 그러나 어렵게만 볼 책도 절대 아니다. 읽다보면 <300>도 나오고, 학창시절에 들어보았음직한 이름도 많이 나온다. 그렇게 하나하나 재미나게 읽다보면 정복되어지는 책이 바로 <역사>다. 물론 그 뒤에 이루어지는 나름대로 해석한 내용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