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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튼의 아름다운 야생 동물 이야기

[도서] 시튼의 아름다운 야생 동물 이야기

어니스트 톰슨 시튼 글/최지현 역

내용 평점 3점

구성 평점 3점

전작주의와는 다른...

  재밌다. 전작주의와는 다른 '같은 책, 다른 버전 읽기'를 시도하고 있는데, 그 첫 책으로 <시튼 동물기>를 하고 있다. 시작은 몇 권 안 되겠지..하며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찾으면 찾을수록 화수분처럼 책이 나왔다. 출판사도 다양하고, 뒤친이(옮긴이)도 다르며, 독자가 어린이인지 어른인지에 따라 그 맛이 모두 달랐다. 앞으로 읽을 책이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계속 읽을 계획이다.

 

 <시튼 동물기>는 어린이책?

  확실히 <시튼 동물기>는 어린이를 위한 책이 아니라 어른을 위한 책이다. 물론 100여년 전에 출간된 책이라 '어린이용 책'이라는 구분이 없었던 시절에 쓰여진 책이니 틀림없다. 그런데도 <시튼 동물기>는 어린이들을 위한 책으로 많이 소개되고 출간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일까? 곤충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해 <파브르 곤충기>가 어린이 눈높이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동물을 소재로 한 <시튼 동물기>도 어린이용을 만든 것일까? 굳이 동물을 소재로 한 소설이 필요했다면 더 아름답고 신 나는 이야기도 많이 있을 텐데 말이다.

 

  내가 보기에 <시튼 동물기>는 좀 우울하고 어두운 점이 있다. '야생의 삶의 끝은 죽음'이라고 설명하는 작가의 설명 뿐만 아니라,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동물도 결국은 인간에게 져서 길들여지거나 비참한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그리스도교적 관점으로 죽음을 묘사한 탓에, 그들의 죽음은 구원 받지 못할 것이나 인간을 도와준 고마운 동물들이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고, 되려 인간에게 해악을 끼친 동물들의 비참한 죽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비록 인간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보여줘서 신기한 점이 있다하더라도 만물의 영장이자 하느님에게 선택된 인간은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우수할 수밖에 없다...라고 읽히는 부분들이 많아 씁쓸하기도 했다.

 

  한편 작가 스스로 자신이 쓴 소설에 '과장'이 많다고 고백하고 있는 점이 '동물들의 야생적 삶'을 그대로 그리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게 만든다. 그의 소설 속 동물들이 '의인화'되어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물들의 생태마저 인간의 삶처럼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가가 말 못하는 동물들을 대신해서 '자신들의 삶'을 이해 못하는 다른 인간들에게 묘사적으로 친절히(?)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을 수도 있다. '동물들도 인간처럼 삶을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시튼을 '동물애호가의 시초'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파브르'처럼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접근을 하지 못한 점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동물 문학의 시초

  다만 많은 사람들에게 '동물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끌어내는 데에는 큰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글북>을 쓴 키플링도 '자신의 책은 시튼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시튼 이후의 '동물 소설'은 모두 시튼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이 널리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글북>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은 '동물과 인간의 아름다운 우정'이었던 것에 비해, <시튼 동물기>에서 느껴지는 점은 '동물들의 비참한 죽음' 뿐이었다. 내가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이 드는 점이다. 원작의 느낌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뒤친이가 뒤치는 과정에서 잘못이 있는 것인지는 더 확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서 읽은 책들에서도 모두 결말은 '동물들의 죽음'이었다. 그것이 비장한 죽음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상관없이 그저 '야생동물들은 인간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다'는 느낌 뿐이었다.

 

  그런데도 작가는 '야생동물들의 삶'을 화려하게 그려내고 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가축들의 삶'보다는 말이다. 시튼의 책에서 '인간답게 멋진 삶을 사는 동물'은 오직 야생동물에게서만 볼 수 있다. 양이나 소, 말이나 닭 같은 가축들은 그저 '멋진 야생동물들의 먹이감'에 불과했다. 특히 암컷은 더더욱 열등하게 그려 놓았다. 이런 관점은 '야생동물의 암컷'에서도 볼 수 있으나 그나마 지극정성으로 새끼를 돌보는 '모성애'를 보여주며 극복하는 이미지를 보여줄 뿐이었다. 가축들 가운데 유일하게 긍정적인 관점으로 그려지는 동물은 오직 '개'뿐이다. 충직함의 명성 그대로 말이다.

 

 아쉬운 점도 보이지만...

  정리하면, 시튼이 그린 '야생동물의 삶'은 화려하고 아름답기 그지 없다. 몇몇 동물들은 인간보다 더 뛰어난 재주를 선보이며 선망의 대상으로 그려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야생성'은 길들여지는 순간 철저히 폄하되며 결국엔 인간보다 못한 존재로 그려지기 일쑤였다. 이렇듯 '만물의 영장은 사람뿐이다'라는 시대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나, 그래도 '동물 또한 인간과 마찬가지로 삶을 영유한다'는 것을 널리 알린 작품이라는 데에 그 의의를 두어야 할 것이다. 시튼 이전의 작품에서는 '동물의 삶' 자체에 관심을 전혀 두지 않았으니 말이다.

 

 <시튼 동물기> 탐험은 계속 됩니다.

 

이 리뷰는 구리시 터줏대감 구리시립-교문도서관에서 빌려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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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깽Ol

    인간이 우수하더라도 결국 삶의 끝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다 똑같죠 뭐.
    삶을 더 화려하게 그린 이유는
    초라한 죽음을 극대화하기 위함인가봐요.-0-
    그래도 좀 나빴네.

    2015.11.22 23:35 댓글쓰기
    • 스타블로거 異之我...또 다른 나

      그렇죠. 모든 생명의 평등...이게 없어요.
      하지만 동물의 삶도 인간과 유사한 삶을 산다는 시각을 널리 알린 작품으로 보입니다. 동물애호의 시초..정도로 말이죠.

      2015.11.23 12:05

PRID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