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읽지도 않은 그 분의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베이스가 다른 저자의 문장과 생각을 읽는 것은 낯선 타국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서 그들과 대화를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어렵고 이해할 수 없었다. 언어도 달랐지만 그들이 읽은 것과 배운 것은 한국에는 전혀 없는 책들과 생각들이었다. 그런 문장과 책이 나올 수 없는 곳에 살아가는 나 자신은 허공에 발길질을 하는 것처럼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page 102 4500여 년 전에 쓰인 텍스트가 완전히 다른 세계. 그러니까 당대 공식적인 언어가 먼지처럼 사라지고 난 뒤 아득히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와 현 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은가!
내 글은 오솔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외롭다. 내밀한 나의 언어가 매일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만 있다.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글은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처럼 '어떤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저자의 문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했던 말과 글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들의 언어를 철수와 영희가 더 친숙한 나의 언어와 문장으로 자리를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읽을 수 있는 토양이 충분하지 않았고 나는 그들의 영토에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한번 스쳐지나간 그 문장들은 쉽게 잊혀져 버렸다.
심지어 내가 접근 할 수 없는 메카시의 영토에서 내가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 있는 것처럼 조지오웰의 책 '나는 왜 쓰는가'에 다 쓰여져 있었고 다정한 서술자는 그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글쓰기에 대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장단점을 말하고 있었다. 모든 현상에서 본질은 '읽기'이므로 '읽기'에 몰두하라고 말하고 있다. 버지니아 울프의 '현대소설'에 쓰여진 글을 인용하며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page 103 그렇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책을 읽기 위해서다.
자연과 동물 그리고 신(종교)과 인간을 묘사하는 인간의 존재는 육체와 영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술자라는 역할이 있었다. 그리고 지구는 물, 불, 흙, 공기, 문학이라는 원소로 되어 있었고 다정한 서술자는 4인칭 시점으로 세상을 묘사하고 있었다. 거기에 내가 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문학은 내게 어떤 개념들에 대한 이론과 규칙을 가지고 틀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깨고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옳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반복의 서사라고 정의를 내리며 내 생각을 마치고자 한다.
page 360 성서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전례 없는 문장을 적어 놓은 인물, 감히 신의 생각을 미루어 짐작했던 서술자는 누구일까요?
신은 서술자의 형이상항이라는 개념조차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든 인간의 생각들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신도 인간과 똑같은 감정과 생각을 가져다고 유추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소망일 뿐 타인의 고통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 세상의 모든 생각들에 반항을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죽은 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태원 사고로 돌아가신 모든 분들에게 한 송이 국화꽃보다 더 아름다웠던 생의 흔적이 안타깝지 않도록 나는 눈물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