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공부를 하고 소설을 읽으면서 작은 단서로 당시를 그려보는 양태가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소설을 읽는 일이 전공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특히 역사를 다루는 소설을 읽을 떄에는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다. 객관성과 주관성 사이에 줄타기를 타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런 바탕 속에서도 이런, 현실적이고도 객관적인 글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런데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면서 고고학의 한계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고고학은 물질로 들어나는 현상에 대해 역사적으로 혹은 객관적으로 복기해보는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작별하지않는다.'처럼 객관적이고도 개인적인 일을 담을 수 있을까? 물론 없을 것이다. 아니. 앖을 것이지 못해 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와 객관은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의 역할은 그런 것이 나리까 싶긴하다. 역사가 담지 못할 약자와 소수의 일을 담는 일. 비록 고고학이 소수가 남긴 물리적인 일에 대해 다루진 못하지만, 그 예민한 일들에 대해 소설로, 시로, 글로 남기는 일. 그것이 나와 다른 문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그리고 가끔은 그 의무들이 질투날 때가 있다.
한강 소설은 생생하다못해 머릿 속에서 영상으로 진행될 정도의 묘사를 통해 정심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하는 힘이 있다. 항상 남아 있는 물질자료로 복기해보게 되는 나의 특성상, 한 순간의 기억이 평생을 좌우하게 했던, 전혀 없을 것 같던 힘마저 내게 했던 정심을 불에 타 돌담만 남은 뒤 재건한 집터로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물질문화만으로는 결코 인간에 다가설 수 없다는 걸 한강이 다시 깨우쳐주었다. 남아있는 물질로는 당연히 모든 물질자료를 다가갈 수 없는 힘을 가질 수는 없고, 또한 그 인간 하나하나의 마음을 꿰뚫을 수 없다. 한강 소설과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전공으로 이러한 사실을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때마다 깨닳는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 걸까. 나는 사실 가공의 차원이 아니라면 무엇도 말할 수 앖는 처지가 아닌가.
채식주의자를 고등학생때 읽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한강 작가 소설을 읽지 않았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며 작가에 대해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내가 눈밭에 모로 누워 인선의 손에 들린 촛불을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