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좋은 시를 만나면 괜히 뒤돌아보게 된다.
내 발자국이 어지럽다.
1.
나는 통화중 신호음을 들었다.
사실 수화기를 들기 전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전화기를 꺼놓고 자신이 부재함을 시위했었으면 포기라도 했을 텐데.
통화중 신호음은 의성어일까, 아니면 의태어일까.
공중전화기를 붙잡고 홀린 듯이 번호단추를 몇 번이나 누르는 몸짓은
모든 걸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기다려주는 뒷사람을 향한 말걸기일까.
아니면, 역시 말걸기겠지?
2.
지상에 닿은 적 없는 안개를 딛고 있는
발목들
흔들리는 발목들
- 고양이의 저녁 中
나는 손을 번쩍 들었다.
어머니께서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꼭 선생님께 물어보라고 하셨다.
선생님, 여기 82쪽에 나오는 쿵떡쿵은 의성어인가요, 아니면 의태어인가요.
뭔가 음탕한 몸짓 같기도 하고, 절박한 소리 같기도 해서 말이죠.
선생님은 매를 번쩍 들었다.
어머 선생님, 뭔가 소통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쿵떡쿵 찰떡이 콩떡이 될 때까지 나를 때려 주셨다.
바야흐로 스크린도어의 시대였다.
3.
그러나 공을 받을 사람은 없고
느씸은 자신이 던진 공을 노려보느라 눈이 충혈된다
공은 젖어 가고 느씸의 눈은 폭발하고
빨간 눈이 흩어지고 흩어진 눈들이 느씸을 바라보고 있다
그가 건진 공은 눈먼 그만이 받을 수 있다
-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 中
시계 소리와 함께 뛰어가는 토끼를 좇느라
거북이에게 간 당근 다 빼주고 하루를 넘기는 데 급급한 우리 잿빛 토끼들에게
시詩의,
유일한 독자는 시인 자신 뿐이지 않을지.
간절한 몸짓은 귀를 닫은 타자의 눈에 비친 착각이 아닐지.
시란, 결국 거리를 인정하면서 적당히 포기하고 포기당하는 게 아닐지.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깊은 골에 괴인
각자의 달이 비치는 이슥한 강 속으로 침잠한
잠수함 속 토끼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몇 안 되는 귀 없는 토끼들의 새빨간 눈에 비친 각자의 달에 대해서.
말입니다.
4.
모든 동물 중에 고양이가 증가할 때
소녀라 믿고 싶은 여자가 남을 뿐
- 엽서 파는 소녀 中
진작에 달나라에는 쿵떡쿵 방아 찧는 토끼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래도 중국 어딘가에는 표도르를 한방에 잠재울 고수가 운둔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거북이는 토끼에게 낮잠을 권유합니다.
그래서 토끼에게 기다란 귀란,
플레이보이지의 바니걸 코스튬에서나 확인할 수 있는 토끼발과 같은 존재이지요.
5.
우리는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를
네발로 걷는 인간을 보았다
오래도록 차가운 중력에 길들여진 우주선의 우리와 같은
- 우주선의 추억 中
저는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선생님. 그러니까 제 말은 널리 유포된 상식과는 다르게
토끼를 토끼로 구분하는 데 있어 귀는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렇지 않다면야 조상님들이 진작에
토끼를 가리켜 귀고기 정도로 불렀지 않겠어요?
개는 멍멍이, 닭은 꼬꼬, 돼지는 꿀꿀이처럼 말이지요.
토끼를 토끼로 규정짓는 데 토끼귀란 토끼 울음소리 정도의 비중 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토끼 울음소리 들어 보셨나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지금이 수학시간인 줄 몰랐습니다.
6.
하나의 방에 얼마나 많은 방이 있는 것인지
방의 깊이를 알 수 없어 방을 나올 수 없다
침묵이 부딪혀 돌아오는 시간의 저 끝에
벽이 있을 거라 짐작할 뿐
- 마임의 방 中
바니걸 코스튬을 발명한 이가 한국인이라는 얘기가 있더라고요.
벅스바니의 제작자도 한국인이라지요?
게다가 내년은 2011년, 희망찬 토끼의 해!
한효주도 저와 같은 토끼띠고요, 그리고 또.
무슨 말씀하시려는 건지 압니다.
암, 말고 말고요.
저는 일주일에 열 번 지하철에 쪼그리고 앉아
마주한 타인의 얼굴이나 그 너머의 창문에 비치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며
강의 수면 위아래를 오르락내리락 발버둥치느라 바쁜, 그런 토끼일 뿐입니다.
그래서 스크린 도어에 시가 매달려 있나 봅니다.
7.
제 얘기 듣고 계신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