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이야기의 가벼움을 인생의 무게로 지탱하다
뻔뻔함과 뻔함 사이
뻔뻔한 감성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첫 문단이 가끔 그렇듯 말장난으로 시작해 보자. 그래도 funfun한 수준까지는 가지 않겠다. 이거야말로 뻔한 거다.
뻔뻔함과 뻔함. 둘은 이제 거의 비슷한 말이 되었지만 어떤 ‘뻔함’은 살아서 시대를 견딘다. 고루하지만 그래도 고전적인 무엇이 된다. 이를테면 너무 지겨워서 진실되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지혜가 있다. 살아가라. 다만 존재하는 걸 넘어서서. 저기, 잠깐만요. 꼰대에는 꼬투리가 인지상정. 퇴폐가 얼마나 쉬운데요.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고, 느린 자살로 하루를 견뎌내는 건 얼마나 간편한데요. 대충 살아내는 인생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편리한가요. 살아가려고 시도하는 순간부터 모든 호흡은 분투가 되는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흥, 그럼 그렇게 살든가. 여기 어떤 여자가 쾌활하게 당신을 비웃는다. 우리 김혜남 작가님 되시겠다.
임나리 글 & 한정구 사진. (2019. 06. 13) 김혜남 “인간을 안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채널예스
저자소개
김혜남.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다 파킨슨병에 발목 잡힌 사람.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닌 걸로 정한 사람. 내 발목을 잡을 수는 있어도 앞길을 막을 수는 없는 걸로, 인생을 끝장낼 수는 없는 걸로 하기로 한 사람. 고통을 마주하고 끌어안기로 한 사람.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 아직 살아가는 중인.
*파킨슨병이란?
파킨슨병은 손발이 떨리고, 근육이 뻣뻣해지고, 몸이 굳는 증상이 나타나는 신경 퇴행성 질환이다. 그래서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심지어 글씨를 쓰고 얼굴 표정을 짓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파킨슨병을 묘사할 때 온몸을 밧줄로 꽁꽁 묶어 놓고는 움직여 보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는데 그 말이 꼭 맞다. 어떨 땐 한 걸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 고생을 하기도 한다. 보통 파킨슨병에 걸리고 15년이 지나면 사망하거나 심각한 장애가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직까지 마땅한 치료법이 없다. 그저 약으로 병의 진행을 더디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한마디로 불치병이라는 소리다.
김혜남. (2022.11.11.)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메이븐
불후의 혜남 희망을 노래하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을 쓴 김혜남 작가는 생존자다. 고려대 출신 전문의일 수도 있고 정신분석학 전문가일 수도 있었다. 그게 전부일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40대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고, 그 사건에 삶을 관통당했다. 울고 현실을 부정하고, 자기 자신을 연민했다. 그런데 어라. 가만 보니 세상은 멀쩡하고 그는 살아있었다. 딱히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래서 그 상태로 삶을 짊어지고 끌어갔다. 질질질. 한 23년쯤. 15년 정도면 죽는다던데 그래도 23년쯤. 환자는 생존자가 된다. 꿈을 수복한다. 목소리를 회복한다. 작가가 된다. 책을 쓴다. 한 열 권쯤 쓴다. 자기 할 말을 한다. 이 책의 말. 인생 똑바로 안 살고 뭐해? 자기 인생도 영 반듯하지는 않으면서,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일주일 뒤 죽는다고 하면 바로 내일 태양이 뜨는 걸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라.
비틀비틀 걸어가는 나의 청춘
똑바로 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아, 이건 너무 뜨거운 감자다. 기름만 부으면 튀김이 되게 생겼다. 범용적인 교훈을 택해보자. 아무래도 건강이 중요하지 않을까?
백투베이직. 중학교 3학년 체육 교과서를 펼친다. 건강.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렇게 말했다 : 단순히 신체적인 질병의 유무만이 아니고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보다 좋은 상태. 어쩐지 인생 살기 어렵더라니. 무려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건강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적 건강은 종교자유 국가이니만큼 넘어가자.)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인생 이지모드에서 하드모드로 넘어가 버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운동하고, 심리학 책을 읽거나 상담을 받고,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말했다시피 건강하게 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들 조금씩 어설프다. 그럴 때 이런 파스텔톤 표지의 에세이들이 끼어든다.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30년 동안 정신분석 전문의로 일해 온 김혜남이 벌써 마흔이 된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 42 (10만 부 돌파 기념 스페셜 에디션)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그러니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그냥 재미있게 살아라!”
펼쳐보자.
오늘도 의미 없는 또 하루가 흘러가죠
삶은 무용한가? 장르가 갑자기 카뮈로 변한다. 더 쉬운 질문으로 바꿔보자. 삶은 모든 순간 무용한가? 그건 아닌 것 같다. 초코 아이스크림이 있는 세상이 나쁘기만 할 리 없다.
아이스크림은 더 많이 그리고 콩은 더 조금 먹으리라.
나딘 스테어,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혹은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골자는 결국 삶을 누리는 마음가짐에 관한 것이다. 세상은 참 이상한 곳이다. 브로콜리와 블루베리 스무디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그들은 다만 존재할 뿐이므로, 세상 역시 다만 존재하는 곳이 된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채. 그 서늘하고 공허한 세계에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삶에 의미가 있다고 믿으면서. 요거트. 제비꽃. 부드러운 담요. 여름의 녹음. 내리쬐는 햇빛.
이때 다정한 개척자들이 나타난다. 의미가 없다면 만들겠어.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정하겠어.
일단 오늘은 예쁜 옷을 입고 외출을 할 생각이다.
김혜남. (2022.11.11.) 만일 내가 인생을 다시 산다면. 메이븐
하지만 그것만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세계인가?
허물어진 몸을 끌어안고 작가가 씩 웃으며 말한다. 당연히 아니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정신적 · 사회적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꿈과 희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법에 대한 조언들은 작가의 허물어진 몸을 매개로 한 발 더 나아간다. 아니, 후퇴한다는 표현이 옳으려나? 사람의 생은 정신적이지만은 않다. 삶은 육체를 통해 발현된다. 그러므로 몸의 한계가 곧 생활의 한계다. 근성으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뻔할 수도 있었던 책이 재밌어지는 건 작가가 다 부서진 몸을 부여잡고 영 못 쓸 건 아니라고 항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못 쓸 건 아니’라는 항변이 꿈과 희망의 모순이 된다. 현실이 된다. 삶의 무게가 된다. 하지만 사람의 중력이 된다.
뻔뻔한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 당신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이 책을 써서.
추천 포인트
재밌게 읽어서 리뷰를 주절주절 쓰긴 했는데 그래도 추천 독자는 정해드려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비슷한 에세이 내에서 제일 보완이 잘 된 책이다. 삶을 살아갈 때 유용하며 다정한 조언들을 다룬다. 다른 책들과의 차별점이라면 명확한 논리가 제시된다는 점을 들겠다. 주장에는 근거가 있고 이상한 예시나 무리한 비유라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어설픈 부분은 작가의 삶으로 설득력을 보완한다. 어떤 내용인지만큼 누가 썼는지도 중요시하는 독자시라면 이 책이 괜찮은 선택이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자 마땅히 삶을 예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