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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우리는 만나고 모여야 한다.
어디서?점심?저녁?몇시에?..두 분을 한자리에 모시고 만나려니 이것이 조율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첫번째 1순위가 된 것이다.
부모가 한집에 살때야 조율이랄 것 없이 그저 명절당일 저녁 친정집으로 출석하는게 통과의례였던것이다.
그러나 이제 집이 아닌 타공간 .날짜.시간. 등 조율이란걸 해야 하는것이다.!
불편이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 만남의 자리도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은 남남이 아닌가!
남남이 된 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표정과 앉아있는 내내 읽을 수 없는 그 오묘한 감정의 실타래의 뒤엉킴.. 끝날때는 무리속에 섞여 있다가 서로 인사도 없이 헤어짐 등.
그 생략되어짐이 나에게는 왜 그토록 더더욱 비현실적인 모임으로 비추어지는 것인지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불편한 모임은 누구를 위한 것이며
집이 멀어진 나로서는 애처롭게도 거기에 대고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 집 머니까 부르지말라고.(혼자 속 으로만) 이 말도 안되는 상식밖에 논리는 차치하더라도 당췌 터무니 없이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 찜찜하기 그지 없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부모라는 테두리가 지녔던 결속이 해체된 한낱 연약한 인간에 불과한 두 노인,즉 전혀 다른 주체들, 각각 한명씩 분리해 놓은 새로운 피조물,낯설음의 존재(75세 이후 허사득 과 이순이가 독립적인 삶을 주체적으로 각자 살아갈 수 있을거라 생각해본적 없음......현재 각자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것도 없음)들을 겪고 바라보고 돌아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는 가족이라면 누구라 할것없이 비자발적으로 이 사건에 동참하는 꼴 인 것이다. 처음 겪게 되는 이 사건을 우리는, 아니 그 자리에 참석하는 모든 어른, 아이,두 노인인 당사자 할 것 없이 이야기하고 웃고 떠들다가도 한순간 이 얼개를 함께하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경계의 선 그 아슬아슬한 금밟기를 무엇이라 이름 붙일것인지 아직은 모두 침묵으로 일관하며 관조하는 것이다.
이것을 선뜻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이기에는 또 무어라 명명하기에는 주저주저하게 만드는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부모의 황혼이혼은 불편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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