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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 유고 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_서문에서
올해 초, 이어령 선생님의 『메멘토 모리 : 이병철 회장의 24가지 질문에 답하다』를 읽고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하는 질문과 마주했다. 질문은 또 다른 생각과 질문을 던지며 이어졌다. 죽음과 절망, 개인을 넘어서는 지혜의 메시지에 희망과 작은 위안을 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어령 선생님은 먼 길을 떠나셨다.
슬프고 아름다운 이별의 마침표, 유고 시집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를 통해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시인 이어령의 시를 만났다. 헌팅턴비치는 이어령 선생의 딸 이민아 목사가 생전 지내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도시다. 시집을 펼치면 딸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그립고 보고 싶은 딸에게 보내는 마음이 구절마다 물결치고 있다. 살아서는 누구도 건널 수 없는 깊은 심연 너머로 흘러간다.
1. 까마귀의 노래
2. 한 방울의 눈물에서 시작되는 생
3. 푸른 아기집을 위해서
4.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5. 부록
1부는 영적 깨달음과 참회, 살아 있음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을, 2부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과 정에 대한 기억과 감사를 담았다. 3부는 아이를 자라게 하는 사랑을, 4부는 딸을 잃은 슬픔과 고통, 간절한 그리움의 시간을 써 내려간다. 부록에는 선생이 쓴 신경균 도예가의 작품에 헌정하는 시들을 모았다.
◇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비가 그치자 나타난 무지개처럼 아름답다
_「당신에겐 눈물이 있다」 부분, p.013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생명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가를'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서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소리 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하는 모든 것이 경이롭다. 단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살아서 느끼는 모든 것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한겨울 나뭇가지 위에 남은 까치밥처럼, 허기진 영혼을 채우는 말씀. "눈물 없이는 먹을 수 없는 빵"은 진주알을 키우는 바다가 되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에 있는 존재와 이어진다. 영원한 빛과 소리에 접속하는 기도가 숨결처럼 스며든다.
◇
'사랑'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생각'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생각한다는 것을 사랑한다고 했지요
희랍말도 그래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오래 생각하는 것이고, 참된 것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_「생각하지」 부분, p.070
손이 많이 가는 어머니 음식, 김자반의 맛처럼. 어머니의 목소리와 얼굴, 그윽한 향내는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시간은 자꾸만 선명해진다. 어머니 품에 안기면 잘못된 것들은 지우고 처음처럼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다. 대신 달려줄 수는 없지만, 관심과 사랑으로 응원하는 목소리에 비로소 삶의 주인공이 된다. 작은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꾼다.
◇
민아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내가 살아서 혼자 밥을 먹고 있는 것이
미안하다 민아야
너무 미안하다
_「살아 있는 게 정말 미안하다」 부분, p.146
보고 싶어도 다시는 볼 수 없는 딸과 함께한 시간은 아득한 추억으로 남았다. 기억의 상자는 사랑하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기억 속 흐려진 모습만큼 못다 한 이야기가 흘러넘쳐 그저 살아갈 뿐이다.
◇
네가 앉았다가 떠난 의자에
내가 앉는다
네가 빠져나간 것만큼
가벼워진 나의 몸무게
(...중략...)
오늘 살아서
시계를 보고 집을 나선다
어제처럼
네가 없는 시간 속으로
혼자 간다
네가 없다
같이 있었는데
같이 있었는데
아
정말 같이 있었는데
네가 없다
거기 그 자리에 네가 앉아 있었는데
네가 없다
_「네가 앉았던 자리」 부분, p.174-177
나 혼자 네가 못 보는 것을 보고, 네가 못 듣는 소리를 듣는 시간. "네 생각이 난다/해일처럼 밀려온다/그 높은 파도가 잠잠해질 때까지/나는/운다", "세수를 하다가/수돗물을 틀어놓고/울었다/남이 들을까 몰래 울었다"
딸을 잃은 아버지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돈으로 안 되는 것이 있음에 절규한다.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너는 없다. 너의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혹시 너인가 해서. 아버지의 바람은 바람이 된다.
◇
그래도 바람 부는 저녁
문지방으로 다가오는
낮은 발자국 소리
어린아이처럼
"아빠" 하고 부르는
너의 목소리.
_「바람 부는 저녁」 부분, p.195-196
파도가 밀려와 모래 위에 눌러 쓴 마음을 품에 안고 멀어진다. 책 표지 그림처럼 하늘과 이어진 바다를 향해 파도가 되고 바람이 되어 달려간다. 마지막 가는 길이 구름처럼 가볍게 떠올라 무심히 흘러간다.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열림원(@yolimwon) 감사합니다.@yes24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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