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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도서] 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저/김태환 역/알랭 바디우 서문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한병철의 책을 세 번째로 읽는다. 학교 교양수업으로 『피로사회』를, 서평단 활동으로 『리추얼의 종말』을 읽었고, 세번째 책은 『에로스의 종말』이다. 한병철은 현대사회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에로스, 나르시시즘, 성과 주체, 전시 사회를 주제로 설명한다. 『에로스의 종말』이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와닿고 강렬했다. 한 문장 마다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모든 문장을 곱씹고 사유해야 했다.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있는지,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에로스의 종말

저자
한병철,알랭 바디우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5.10.05.

에로스와 나르시시즘적 주체

" 에로스는 강한 의미의 타자, 즉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를 향한 것이다. 따라서 점점 더 동일자의 지옥을 닮아가는 오늘의 사회에서는, 에로스적 경험도 있을 수 없다(19p)."

"바로 아토포스적 타자에 대한 경험 자체가 사라져버린 까닭에, 우리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비교하며 이로써 모든 것을 동일자로 평준화한다. 타자의 부정성은 소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비사회는 아토포스적인 타자성을 제거하고 이를 소비 가능한, 헤테로토피아적 차이로 대체하려고 노력한다.(19p)"

"우울증은 나르시시즘적 질병이다. 우울증을 낳는 것은 병적으로 과장된 과도한 자기 관계이다.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의 주체는 자기 자신에 의해 소진되고 기력이 꺾여버린 상태이다. 그는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이다. 에로스와 우울증은 대립적 관계에 있다. 에로스는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잡아 채어 타자를 향해 내던진다. 반면 우울증은 주체를 자기 속으로 추락하게 만든다.(20p)"

"이러한 파국적 사건, 외부의 침입, 완전히 다른 자의 침입은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사건, 자신의 지양이자 비움, 즉 죽음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늘의 공허. 유예된 죽음: 재앙" 그러나 이 재앙은 아이에게 "어마어마한 기쁨"을, 부재의 행복을 안겨 준다.(27p)"

저자는 에로스와 나르시시즘에 대해 논한다. 에로스는 무소성, 장소없음, 규정되지 않음을 특성으로 하지만, 같은 것으로 회귀하는 현 시대에는 경험할 수 없다. 에로스가 종말되는 이유는 무한한 긍정성과 소비사회이다. 에로스를 경험하지 못하기에 나르시시즘적 주체가 되고 우울증을 겪는다고 말한다. 타자를 경험하는 건 나 자신에게 온전히 벗어나 내가 파괴되는 것, 하지만 그것이 곧 해방이다.

나는 에로스를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어떤 에로스를 회복하고 싶은가. 에로스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온전히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내가 붕괴되고 해방되고 새로운 내가 된 경험이 생각나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내던지기보다, 꽁꽁 싸매고 타인과 비슷해지려 했다. 진정으로 에로스를 경험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 수 없음" - 성과사회, 자기 착취

 

"생산성이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해야 함은 곧 한계를 드러낸다. 생산성의 향상을 위해서 해야 함은 할 수 있음으로 대체된다. 착취를 위해서는 동기 부여, 자발성, 자기 주도적 프로젝트를 부르짖는 것이 채찍이나 명령보다 더 효과적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명령하고 착취하는 타자에게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지만, 결코 진정으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체는 자기 자신을, 그것도 자발적으로, 착취하기 때문이다. 착취자는 피착취자이기도 하다. 그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다. 자기 착취는 자유의 감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타자 착취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다. 이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진다.(29p)"

"‘넌 할 수 있어’라는 구호는 엄청난 강제를낳으며 성과주체를 심각하게 망가뜨린다. 성과주체는 자가 발전된 강제를 자유라고 여기며, 강제를 강제로 인식하는 데 실패한다. ‘넌 할 수 있어’는 심지어 ‘넌 해야 해’보다 더 큰 강제력을 행사한다. 자기 강제는 타자 강제보다 더 치명적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1p)"

"할 수 있음의 절대화는 바로 타자를 파괴한다. 타자와의 성공적인 관계는 일종의 실패로 여겨진다. 타자는 오직 할 수 있을 수 없음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 우리가 타자를 소유하고 붙잡고 알 수 있다면, 그는 더 이상 타자가 아닐 것이다. '가지다' '알다' '붙잡다'는 모두 할 수 있음의 동의어다.(41p)"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소비의 대상으로 삼기 위해 도처에서 이질성을 제거한다. 에로스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관계다. 에로스는 교환 관계를 중단시킨다. 이질성은 부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질성은 대차대조표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48p)"

현 사회는 자기 착취 사회이다. 자기를 굴리고 결국 고갈된다. 파고 파고 또 파도 나올 게 없을 때까지 나를 불태우는 사회이다. 나 자신을 자본주의 사회에 팔아야 하고, 나는 상품이 된다. 잘 팔리기 위한 나를 만들기 위해 자기 착취를 꾸준히 해야한다. 즉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 관념을 비판한다. '할 수 있음'은 타자를 파괴하는 것이며, '할 수 있을 수 없음' 상태일 때 타자가 드러난다. 할 수 있다고 정형화 하는 것 자체가 에로스와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긍정성과 '성취'해야하는 사랑

"오늘날 사랑은 긍정화되어 향락의 공식으로 여겨진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안락한 감정을 생성해야 한다. 사랑은 더이상 행위도, 이야기도, 드라마도 아니며, 흔적을 남기지 않는 기분이요 흥분이다. 이제 사랑은 상처와 급습과 추락의 부정성을 알지 못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너무 부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을 이룬다. “사랑은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의 주도권에 따라 만들어지지 않는다. 사랑은 밑도 끝도 없이, 우리를 급습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입한다.” 할 수 있음이 지배하는 성과사회, 모든 것이 가능한 사회, 주도권과 프로젝트가 전부인 사회는 상처와 고뇌로서의 사랑에 접근하지 못한다. (43p)"

"모든 삶의 영역이 긍정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가운데 사랑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과잉이나 광기에 빠지지 않은 채 즐길 수 있는 소비의 공식에 따라 길들여진다. 모든 부정성, 모든 부정의 감정은 회피된다. 고통과 열정은 안락한 감정과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흥분에 자리를 내준다. 속성 섹스의 시대, 즉흥적 섹스, 긴장 해소를 위한 섹스가 가능한 시대에는 성애 역시 모든 부정성을 상실한다. (51p)"

"“사랑의 진정한 본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을 포기하고, 다른 자아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린다는 점”에 있다.(57p)"

현대 사회의 사랑은 긍정성으로 가득 차 있다. 항상 행복해야 하며, 소위 말하는 '괜찮은' 상대를 만나야 하는...등 하나의 성취가 됐다. 그 말은, 사회가 정의한 성공한 사랑을 하지 못했을 때 낙오자가 된다. 나를 지우고 타자에게 온전히 던지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한다. '성취'해야 하는 사랑으로는 충만할 수 없다. 성공적 사랑을 위해 나를 착취해야 하고, 잃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하고, 즉 진정한 타자 경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병철 책은 너무 좋은데 어렵다. 얇고 꽤 이독성(가독성)이 괜찮은 편인데(철학 번역책 치고는...) 나름 정리를 해보려 했지만, 책 전체를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아쉬워서 다시 꼭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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