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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1

유시민 저
생각의길 | 2019년 07월

 

보통 시리즈로 된 책을 읽을 땐 1권부터 차례대로 읽는다. 그런데 이 책은 2권부터 읽었다. 저자가 추천해주는 책은 읽었어도 막상 저자가 쓴 책은 못 읽었다. 나에게는 정치인 유시민의 이미지가 너무 강력했기 때문이다. 우연한 기회에 2권을 읽고 저자의 필력에도 반하게 되었다. 기행문이라도 다른 저자의 기행문하고는 다른 면이 있었다. 저자와 함께 여행하는 중에서도 인간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묘한 매력을 느껴 1권에도 도전하게 되었다. 그럼 지금부터 함께 여행을 시작해본다.

 

1아테네-멋있게 나이 들지 못한 미소년 아테네를 여행하는 김에 들렸던 살라미스를 소개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는 여수나 통영을 비롯하여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곳마다 이순신 장군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진도만 가도 명랑해전의 울돌목으로 많은 관광객을 끌어당긴다. 그런데 이곳 그리스는 살라미스 해전이라는 놀라운 역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살라미스는 조용한 섬에 그치고 있을 뿐이었다. 마라톤이라는 좋은 전설 소재가 있음에도 마라톤은 단순한 평원에 그치고 있다. 새삼 IMF를 대한 우리나라와 그리스가 비교됐다. 저자는 먼저 아크로폴리스를 찾았다. 하지만 파르테논 등의 신전만 보일 뿐이었다. 그것도 온전한 모습이 아닌 세월의 풍파를 겪은 모습으로. 결코 강대국이라 할 수 없는 그리스의 역사 속에서 유물을 지켜내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크로폴리스파르테논이 도시국가 아테네의 위상을 위해 존재했다면 아고라프닉스 언덕민회가 열리는 민주주의의 무대였다. 이러한 민회라는 제도를 행해왔던 그들이었지만 여성에게는 편협한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오늘날의 퍼스트레이디 같은 역할을 했던 인물이 아스파시아였다. 그녀는 페리클레스의 연인으로 등장하였으나, 출신문제(난민으로 외국인은 차별하는 법률 때문에 정식 결혼을 못함)로 많은 비하를 받았으며 역사에 기록되지도 못했다.(투키디데스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아테네의 관문이라 불릴 수 있는 항구도시 피레우스는 아테네라는 도시에 들리면 소풍으로 갈만하다.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있다. 소크라테스 때문에 플라카지역은 저자에게 정겹게 다가왔으며 그 정겨움이 읽는 나에게도 전달되어 아테네에서 접했던 음식에도 관심이 갔다. ‘그릭 샐러드’, ‘돌마데스’, ‘수블라키’, ‘차지키’, ‘무사카’, ‘예미스타‘, ‘우조등의 그리스 음식은 하이퍼링크의 힘을 빌리고 이웃나라 터키와 많은 음식을 공유한다는 점만 소개한다. 이유는 여러 차례의 정복전쟁으로 땅을 뺏고 뺏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주민들의 상호 이주 사태다.

2로마- 뜻밖의 발견을 허락하는 도시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칭해지는 로마는 많은 역사적인 건물과 장소가 있다. 하긴 천년제국 로마제국의 중심지요 중세에 이르러서는 교황의 주 무대였으니 그 때문에 생겨난 건축물들이 모여 있다. 팔라티노 언덕의 황궁 터에서 보이는 로마의 거리를 바라보며 황제의 기분을 느끼고 과시욕의 아이콘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오와 개선문을 살펴보는데 개선문 중에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소개한다. 공화정을 시행했던 로마포로 로마노에서 많은 정치행위를 했지만 제정에 들어서면서 황제들은 공론장이 아닌 개인만의 포로를 여러 곳에 지어댔으며 이곳은 권력자들의 기념사업, 시민들의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로 용도 변경되었다. 그 자신은 황제가 못되었지만 사실상 제정으로 인도한 카이사르도 이곳 포로 로마노에 많이 서봤을 터이다. 판테온은 그 자체는 만신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피렌체의 대성당 뿐 아니라 여러 도시 성당의 돔의 효시 되었다. 통일 이탈리아왕국의 초대왕은 에마누엘레 2지만 실상 통일의 업적에는 가리발디의 도움이 컸다. 가리발디비토리아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서 만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는 로마 하면 바티칸을 뺄 수가 없다. 통일 이탈리아 왕국은 바티칸을 부정하고 하나의 이탈리아로 통일해버렸지만 1929무솔리니라테라노 조약에서 바티칸을 하나의 시국(市國)으로 인정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이곳이지만 바티칸에서는 종교권력은 맛볼 수 있을지언정 종교를 맛볼 수 없다. 진정한 종교는 아시시의 성 프렌치스코에게서 맛보았다. 이러한 감상으로 바티칸을 빠져나와 젤라또를 먹으며 노천시장이 열리는 피오리 광장으로 향하던 중 브루노 동상을 만났다. 브루노는 종교 개혁자라고는 볼 수 없지만 과학에 대한 그의 신념을 굽히지 않다가 가톨릭교에 의해 이 곳 피오리 광장에서 화형을 당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당연한 내용의 과학 상식을 주장하면 종교적 이념에 어긋난다고 화형을 시켰으니 교황이라는 작자들의 죄를 어찌 감당할꼬. 이제는 음식 소개 타임이다. 이탈리아의 음식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니 건너뛰고 저자의 여행지에서 식당 감별법을 소개한다. 나도 동의하는 내용이다. 1.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음식점은 피하라. 2. 신선한 재료를 쓰는 집을 찾아라. 3. 현지 손님이 많은 식당을 찾아라. 결국 3번만 잘 적용하면 여행 중 음식은 그럭저럭 성공하리다.

3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뀌었으니 이곳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이슬람의 문화가 혼재해 있을 법 했다. 그러나 이슬람은 기독교 문화를 회칠 속에 가두어버렸으니 아야 소피아가 그랬다. 그걸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이 해방시켰다. 회칠을 걷어냈던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으로 변신했다. 아야 소피아의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블루모스크는 많은 인기를 얻고 있었다. 종교적인 역할을 계속하고 있음이려나? 아야 소피아는 박물관으로 변해 그 기능이 변질되었으니까. 아마 이 블루모스크를 비롯한 모스크들이 경쟁적으로 아잔을 외쳐대니 가히 아잔 배틀이라 할 만하다. 이스탄불에는 약탈문화재가 많다. 그중 압권은 지하궁전이다. 튀르기예어 이름은 예레바탄이다. 구시가지 3대 건축물 중의 하나인 토프카프 궁전은 이곳 이스탄불의 전신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메메트2에 의해 처음 건축되었으며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술탄의 거처가 옮겨지기 전까지 많은 술탄들의 거처였으며 오스만제국의 심장부였다. 돌마바흐체 궁전 때문에 터키의 근대화가 늦어졌다고 해야 하나? 유럽 열강이 교육과 과학 기술을 진흥하고 신무기를 갖춘 상비군을 양성하는 가운데 술탄의 권위를 위해 궁전이나 신축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메메트2에 의해 이스탄불로 바뀌었지만 도시의 다양성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다양성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제창한 민족주의의 기치아래 모든 것이 터키 위주의 단색으로 물들게 되었다. 역사와 종교의 무대 구시가지를 뒤로하고 신시가지의 탁심광장은 모든 정치단체와 시민단체의 집회의 장소였다. 드디어 현대도시의 면모를 발견했다. 이스티클랄 거리는 우리나라의 홍대거리, 명동거리 등과 같은 번화가였다. 드디어 터키의 국민음식 케밥을 만났다. 이스탄불에서는 불에 구운 모든 것케밥이었다. 또 하나 터키식 커피? 아니 오스만 식 커피라고 해야 맞을 듯했다. 오스만 제국 술탄이 그렇게 마셨고 황실의 사람들에 의해 점차 퍼졌으니까. 이제 튀르키예라고 하자. 튀르키예에 여행가서 튀르키예식 커피를 맛보려면 제대로 하는 집을 찾아가야 한다. 가짜가 많다.

4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저자는 우리 사피엔스의 문화 수도로 파리를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에펠탑이 있기 때문이란다. 처음에는 의아했던 이 말이 읽고 나니 이해가 되고 나도 동감한다. 많은 역사도시에 남아있는 건축물들은 종교, 정치 권력자들의 권세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어졌다. 그리고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박제되어 있다. 그러나 에펠탑은 정부가 디자인을 공모해서 만들었고, 철거 위기에 처한 것을 시민의 힘으로 보존했으니 민주주의의 정신이 살아있는 구조물이다. 역시 대혁명의 정신이 살아있는 도시였다. 또한 파리에는 오욕의 옛 역사를 그대로 기리는 흔적도 남아 있으니 이 도시는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도시였다. 1961년의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를 기리는 꽃다발이 생 미셀 다리 들머리동판 앞에 놓여있었다. 우리나라도 비슷한 역사가 있어서 ‘2.8 독립선언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나의 검색 실력이 부족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역시였다. 일본 도쿄에는 우리 한국인에 의한 흔적은 있으나 생 미셀 다리 들머리동판 같은 것은 없었다. 파리는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과 같은 오래된 건축물은 없어도 다음의 것은 견줄 만하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익숙한 듯하다. 노트르담 대 성당 루브르 박물관 상젤리제 거리 베르사유 궁전. 나는 순서대로 빅토르위고의 작품 노트르담의 꼽추, 약탈문화재 전시장, 아름다운 거리, 1차 대전 종전회담의 장소가 우선 생각난다. 루브르박물관은 원래 루브르궁전의 일부였다. 대혁명에 성공한 시민들이 권력자의 궁전을 박물관으로 재사용하다니 시민의식이 대단하다. 샹젤리제 또한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의 산책로에서 시작되고 오스만 남작파리 개조 사업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췄으니, 오늘날 샹젤리제를 걷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고마워해야하나? 베르사유 궁전을 만들고 그 궁전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던 부르봉 왕가를 생각할 때 전염병의 공정함(?)을 생각한다. 파리의 위생은 아주 안 좋아서 권력자나 서민이나 전염병으로부터 공평했다. 한마디로 다 똑같이 죽었다. 훗날 오스만 남작파리 대 개조 사업을 통해 조금이나마 위생상태가 좋아졌다. 나폴레옹은 카루젤 개선문을 세웠으나 이에 만족을 못하여 에투알 개선문을 세워 드골 광장을 비롯하여 파리의 12거리를 잘 감상할 수 있는 길을 만들었다(?) 아무리 불순한 의도로 만들었어도 후세가 그것을 좋은 쪽으로 사용하면 그만이다. 누가 뭐라 해도 파리는 예술의 도시이다. 오르셀 미술관 로뎅 미술관을 많은 박물관, 미술관, 공원들이 즐비하다. 오스만남작의 파리대개조 사업으로 갈 곳이 없어진 많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몽마르트르 몽파르나스로 몰렸지만 지금은 몽마르트르에서만 예술의 흔적을 찾을 수 없고 몽파르나스는 현대적 시가지를 변모했다. 59층짜리 몽파르나스 타워와 쇼핑텐터, 극장 위주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이제 음식 이야기를 해본다. 프랑스 음식이 고급음식이라는 소리는 들어봤다. 푸아그라, 코코뱅, 라타투이, 퐁듀, 에스카르고, 부아베스, 크레페, 양파수프, 크루아상 . 그러나 우리 한국 요리는 어떤가? 김치찌개, 된장국, 제육볶음, 해물아귀찜, 김치, 밥 등의 표준 메뉴.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 음식을 평가 할 수 없다. 손맛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프랑스 요리도 셰프의 행위가 중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대령숙수가 있다. 음식에서는 기 죽을 필요가 없을 듯하다.

 

2권을 대할 때는 주로 장소 위주로 정리해나갔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느꼈던 것이 음식이야기도 많이 언급되는 것을 느꼈다. 사실 여행 하면 현지의 음식을 빼놓을 수 없다. 저자와 같이 자유여행을 하는 경우 특히 더욱 그렇다. 거기에 현지인과의 교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TV프로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보아도 그러한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그래서 많은 시청자 팬을 가질 수 있고 나 또한 그렇다. 이런 점을 느끼면서 1권처럼 장소는 물론 음식, 문화까지도 관심을 두고 살펴보았다. 그러나 결국은 장소 위주로 정리한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꼴이 되었다. 기행문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 내가 여행에 동참하는 느낌이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점을 더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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