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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노래한다

[도서] 풀잎은 노래한다

도리스 레싱 저/이태동 역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이 소설은 살인사건 현장에서 시작한다. 범인이 제 발로 나타나 체포되었기 때문에 추리소설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모시던 주인 여성을 왜 죽였는지 말하지 않는다. 뒤에 나오는 메리 터너의 이야기를 통해 독자는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식민지 남아프리카에서 왜 백인여성 메리가 흑인 남성에 의해 살해되었는지. 성차별과 인종차별, 자본주의와 계급 모순이 얽힌 그물망 속으로 들어가야 그녀의 죽음이 지닌 미스터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백인들의 식민지 남아프리카에서 가난하면서도 술을 좋아한 아버지 때문에 메리의 부모는 행복하지 않았고 메리는 불행한 어머니의 처지에 공감하며 자랐다. 언니와 오빠가 전염병으로 죽으면서 가정형편에 숨통이 트이자 기숙사 학교에 들어가게 된 메리는 처음으로 행복한 삶을 시작한다. 열여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사무원으로 취업한 메리는 경제적으로 자립한다. 이후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마저 집을 떠나면서 여성회관에서 살게 된 메리는 나름대로 여유있고 만족스런 인생을 사는 미혼 여성이다.

 

  메리의 운명이 바뀌는 계기가 찾아온 것은 서른 살이 되었을 때다. 서른이 되도록 결혼하지 않고 소녀처럼 사는 메리에 대해 '나사가 빠졌다'고 친구들이 뒷담하는 소리를 들은 메리는 충격을 받는다. 그 후 결혼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메리는 우연히 알게 된 리처드 터너라는 농부와 결혼해 시골 농장에 정착한다. 리처드는 수 년째 시원찮은 수확으로 인해 결혼의 꿈을 미루어오던 젊고 진지한 농부다. 리처드가 혼자 살던 비좁은 집에서 메리는 양철 지붕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햇볕을 견디며 집안 일을 돕는 흑인 남자하인을 곁에 두고 안주인 행세를 하는 처지다. 그러나 결혼 전까지 남아프리카의 흑인들과 직접 대면할 일이 없던 메리에게 흑인은 무지하고 냄새나는 혐오스런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신경이 곤두서는 나날을 보내던 메리는 번번이 잔소리를 하며 하인을 다그치고 내보내기를 반복한다. 백인 사회의 모임에 나가지 않는데다 흑인을 자주 바꾸는 터너 부부는 고립되고 미움 받는다.

 

 마침내 남편 리처드는 농장에서 일하던 모세라는 '교회 출신' 원주민을 하인으로 쓰도록 데려오는데 더 이상 하인을 구할 수 없으니 모세를 내보내면 안 된다는 경고를 한다. 모세는 리처드가 말라리아로 병석에 누워있을 때 남편 대신 채찍을 휘두르며 농장일을 감독하던 메리와 악연이 있는 흑인이라 싫었지만 메리는 남편에게 말하지 못한다. 얼마 후 하인 일을 그만두겠다는 모세를 말리면서 메리가 울면서 사정한 후 그들의 주종관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그즈음 메리의 정신 세계는 서서히 붕괴하고 있었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모세는 메리에게 "불손한 적은 없어도" "자신을 인간으로 취급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식민지 남아프리카의 백인 사회에는 백인 연대라 할 수 있는 '백인의 규율'이 있다.

"'너희는 동료 백인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도록 내버려두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되면 깜둥이들이 자신이나 너희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를 준수하는 것이다." (306p)

 

 그 무렵 방문한 이웃 농장주인 찰리 슬래터는 평소 터너의 농장에 마음을 두고 있던 사람으로, 터너 부인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하고 농장을 돌봐줄 테니 몇 달간 요양을 다녀오라는 후한 제안을 하고 부부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슬래터는 농장을 돌봐줄 감독관으로 토니를 구하는데, 그는 농장일을 배워 성공하려고 남아프리카에 온 영국 청년으로 터너 부부가 떠나기 전까지 인근 오두막에 살며 몇 주간 일을 배우기로 한다. 한때 메리와 모세의 관계를 의심했다가 메리를 동정하게 된 토니는 모세를 꾸짖었고 그에 동조한 메리에게 원한을 품은 모세는 마침내 메리를 살해하고 자수하기에 이른다.

 

 메리의 죽음은 백인 사회에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만 모두가 침묵한다. 심지어 메리를 동정하고 이해하고자 했던 토니조차 무언의 압력을 받아 재판소에서 메리의 죽음에 대해 진부한 진술을 늘어놓는다. 아니, 그는 이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깜둥이에 의해 백인 여성이 살해되었다는 수치심과 죽음을 자초한 한심한 백인 여성의 행실을 침묵으로 비난함으로써 백인들은 증오와 두려움을 감춘다. 우월한 백인 문명이 계속 유지되고 번창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백인 문명. 백인이, 특히 백인 여자가, 경우가 어찌 되었든 간에 흑인과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걸 결단코 용납하지 않을 백인 문명은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일단 그러한 관계를 인정해주면, 백인 문명은 붕괴되어 그 무엇으로도 구제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인 문명은 터너 부부의 경우와 같은 비참한 실패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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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초보

    메리의 죽음에 백인들 모두가 침묵했다는 것이 흑백의 차별보다도 더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메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어려서의 가정환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생각해 보고요. ㅎ

    2019.12.24 18:40 댓글쓰기
    • 파워블로그 아그네스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에다 강박적인 결혼과 인종차별주의 등이 얽힌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람의 문제가 어느 한두 가지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복잡하게 얽혀 일어나니까요. 영화로 만들어지면 좋을 것 같은 작품이에요.^^

      2019.12.26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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