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어떤 대상을 두고 ‘~답다’고 말한다. ‘학생답다, 선생님답다, 부모답다‘라는 말 속에는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자격을 인정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러면 종교인다운 종교인은 어떤 모습일까? 군부독재 권력에 맞서 가난하고 핍박받는 노동자와 농민들 편에서 무자비한 권력을 서슴없이 비판하고 사랑과 구원의 말씀을 전하다 총탄에 맞아 숨진 종교인이 있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는 자신의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 참으로 종교인다운 종교인이다.
사실 종교만큼 오랜 세월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것도 많지 않다. <독일문화 읽기>를 보면 독일의 어느 맥주 집은 종교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손님은 받지 않는다고 경고문을 써 붙여놓았다고 한다. 종교와 정치 이야기는 싸움으로 끝나기 십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에 나오는 젊은 층이 점점 줄어들고 현대인들로부터 외면 받는 종교 현상은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닌 듯하다.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재주를 타고난 시장자본주의는 칼뱅의 금욕적 종교 윤리를 비웃은 지 오래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는 두 얼굴을 지녀왔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 사랑과 심판, 순종과 혁명적 예언의 말씀 등으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며 성전이란 명목으로 전쟁도 불사해왔다. 양날의 칼을 휘두르며 군림해온 역사의 무법자 같은 존재가 그리스도교란 종교인 셈이다. 이 과정은 동시에 두 얼굴의 종교인을 배태하는 흐름을 낳기도 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설파한 예수님 말씀은 성서 안에 박제된 금단의 열매처럼 생명을 잃은 지 오래다. 인간과 인간사의 모순은 오늘날의 종교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에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모든 종파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왔다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종교가 인류의 복리라는 공통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발전이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현대인들로부터 외면 받는 그리스도교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제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답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를 있게 한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들 편에 서서 탐욕스런 권력을 꾸짖고 회개하도록 이끈 예수님의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1%도 안 되는 사람들이 부와 권력을 누리며 99%를 억압하는 사회는 분명히 잘못되었다.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는 자신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예수님의 삶과 사랑을 실천한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보여준 순교자다. 1980년 3월 미사 중에 암살단의 총에 맞아 숨진 그의 죽음은 종교가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회복하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상징적으로 가르쳐준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무시 받고 억압받으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희망의 예언자 오스카 로메로>를 읽으며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