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로 온 국민의 분노와 절망이 매일 밤 촛불 시위로 번져가는 요즘이다. 평소 이름만 알던 장준하 선생의 항일 대장정기 <돌베개>를 읽으며 나라를 빼앗긴 민족과 개인의 설움이 어떠한지 절절하게 느꼈다.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해" 항일 독립투쟁을 결심하고 학도병에서 탈출해 김구 선생의 임정을 찾아가는 길에서 겪은 장준하 선생의 고초는 나라의 운명과 개인의 삶이 하나임을 눈물겹도록 생생하게 보여준다.
1975년 유신헌법 개정을 위해 애쓰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실은 장준하 선생과 선생이 하던 일의 중요성을 반증한다. 이 책은 장준하 선생이 항일 독립 대장정기를 회고록 형식으로 써나간 글이다. 선생은 일본 신학교 재학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지원해 중국 쉬저우로 끌려갔다가 동료 셋과 목숨을 건 탈출에 성공했다. 이후 장제스 휘하의 중국군을 거쳐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6천 리 길의 수난과 해방된 조국에 김구 주석의 수행 비서로서 돌아오기까지 선생의 고난과 신념, 해방 전후의 국내 상황과 배경이 잘 드러나 있다.
책을 읽으면서 제목이 왜 돌베개인지 궁금했다. 알고보니 선생은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해 일제의 미움을 받았던 신앙 깊은 목사의 장남이다. 돌베개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돌을 베고 잤다가 꿈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 돌을 석상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다. 장준하 선생의 돌베개는 죽음도 불사하고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신념의 이정표와 같다.
"내 이 광야에서 벨 베개는 돌베개임을, 벌써 일군을 탈출하기 전 마지막 편지로 아내에게 말하였고 또 각오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제부터 내가 베어야 할 나의 돌베개는 어느 지점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가. 나의 고행은 어디서부터 정작 시작되어 어디까지 가야할 것인가."
선생이 임정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중국군에 머물 때 팔로군에 쫓기며 암벽 산을 오를 때의 심정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또 뱃속의 시장기를 채우기 위해 "풀잎이라도 짓씹어보고 싶은 욕구를 견디어내며 나는 야곱의 돌베개를 생각했다."고 한다.
학도병 탈출에 성공하고 도움을 받은 곳이 중국군이다. 당시 중국은 장제스의 국민당과 마오쩌뚱이 이끄는 공산당으로 갈라져 각기 항일 투쟁을 벌이며 알력과 합작을 거듭하던 때다.
유격대에서 훈련을 받으며 이를 목격한 선생은 "중국의 동족 상잔이 얼마나 비분강개할 노릇인가 하는 통탄만이 걷잡을 수 없이 한심스러웠다."고 말한다. 또 미국이 일본의 패망을 촉진시키기 위해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에 홀려 공산당에 동정적인 행보를 보인 것은 오늘날 중국의 공산화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후 임정에서 알게 된 약산 김원봉 일파의 공작과 해방된 조국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활약에 대한 선생의 미움이 이 책에서 일관되게 나온다.
선생은 충칭의 임정에 닿기 전에 중국중앙군관학교에 마련된 한국광복군 훈련반에서 3개월을 보낸다. 막사 옆의 중국 군인들은 사격연습을 비롯하여 군인다운 훈련을 받는 데 비해, 한국 광복군은 목총 한 자루 변변이 없는 형편 때문에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권태는 새로운 적으로 우리를 자포자기 속에 빠지게 했다."고 회상한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대학에서 배운 전공을 살려 신학, 사학, 철학, 법학, 문학 등을 동지들과 서로 돌아가며 강의하는 것과 광복군의 길잡이가 되어 줄 잡지 <등불>을 만드는 일이었다.
마침내 파촉령을 넘어 선생과 일행이 임정이 있는 충칭을 바라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마음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신념이란 우리 인간이 가질 수 있고 구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생명력"임을 체험을 통해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이 목숨을 걸고 찾아간 임정은 조국 해방에의 일념으로 똘똘 뭉친 기구가 아니었다.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한국무정부주의자 연맹, 한국민족해방동맹, 한국 청년단, 천도교, 무소속 등으로 "셋집을 얻어 정부 청사를 쓰고 있는 형편에 그 파는 의자보다도 많았다"고 씁쓸하게 술회한다.
자국의 힘이 아니라 미군과 소련 등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기 위해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의 전략첩보대) 특수훈련을 받으러 시안으로 가는 수송기에서 선생의 가슴을 파고든 생각은 이후 선생과 조국의 앞날을 예견하는 듯하다. "야곱의 돌베개가 이제 미군용 침대로 변한 것은 의미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 잠을 곧 허락해주지 않는 것도 어떤 절대자의 의사이냐?"
1945년 12월 19일. '임시정부개선환영회'가 서울 운동장에서 열렸다. "개선을 하고 돌아온 것은 분명 아닌 것을 어쩌랴. 개선을 하고 그 환영회를 받는 처지였다면 어찌 임정의 위치가 이리도 애매하겠는가."라는 심정으로 선생은 환영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해방된 민족의 영웅과 같았던 백범 선생은 이날 환영회 답사에서, "지금 우리 국토를 분구점령하고 있는 미, 소 양국 군대는 우리 민족을 해방하여준 은혜 깊은 우군입니다. ... 우리는 반드시 그들에게 잘 협조하여 왜적의 잔세력을 철저히 숙청함과 동시에, ... "라고 외쳤다. 그러나 "이미 이 시간에 민족의 운명은 우리가 절대 우호를 부르짖던 그 대상국에 의하여 모스크바 3국 외상회담의 준비를 위하여 요리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이승만 박사의 담화를 통해 그 시간에 신탁통치안이 검토되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신탁통치로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대한민국의 상황이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국정이 농단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오늘의 상황과 겹치면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이 품은 조국애가 역사의 시간을 뛰어넘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