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타락한 시대이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전쟁이 나도 평화인 줄 알고, 노예가 되어도 자유로운 줄 알고, 모르는 게 자랑인 줄 알며 살게 될 것이다. 하물며 비판은 못할지언정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일에, 그런 타락에 곡학아세하며 동조해서야 되겠는가? (477쪽)
오웰의 [1984]를 떠올리며 논평을 붙인 역자 후기의 한 대목이다. 우리 주군은 천사이기에 무결점 무오류인데 하찮은 것들이 공연히 덤터기 씌워 단죄하려는 것이라며 범죄자를 극구 옹호하는 모 인사의 언동이 겹쳐지는 대목이다. 전제군주정 시대, 아니 신권정치 시대를 살아가는 신민의 의식에 머물고 있는 그들은 오히려 확신에 차 있다. 헌재 법정에서 국가의 상징물을 펼쳐보이는 퍼포먼스는 젠체하는 것이 아닌 천박한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이다. 근대적 의식과 최소한의 교양도 못 갖춘 이들이 내뱉는 언어는 언어이되 말도 안되는 언어이다.
여기 실린 오웰의 글 중 몇 편은 100년도 넘은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고민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되풀이되고 있다는 사실에 아득해진다. 향후 100년 이내에 인간다운 삶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승리를 거둘 것이라던 오웰의 예언은 틀린 셈이다. [동물농장]과 [1984]을 통해 탁월한 예지력을 보여주었던 오웰이 이 부분에선 한참 잘못 짚은 것이다.
오웰은 대여섯 살 때부터 작가가 되리란 것을 운명적으로 알았다 한다. 낱말을 다루는 천부적인 재주를 타고 났고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글쓰기 인생에 일대 격변을 가져올 사태에 직면한다.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글을 쓰려는 동기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순전한 이기심의 발로로 글을 쓰려는 시도이다. 허영심과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둘쩨는 미학적 열정 때문이다. 아름다운 것을 나누고픈 욕구에서 글이 나온 것이라 보았다. 셋째로는 역사적 충동을 꼽았다. 후세를 위해 글로써 남기려는 의도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고 타인의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수단적 글쓰기인 것이다. 그 가운데 오웰은 넷째 동기, 곧 정치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고 밝힌다. 이는 스페인 내전 참가 이후 확고하게 굳어진 패턴이라 한다. 물론 그는 정치적 글쓰기를 하되 앞의 세 가지 동기를 아우른 포괄적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정치적 글쓰기를 예술로 승화시키려 했던 것이다. 사악한 시절에 태어나 성직자와 인민위원 사이에서 방황하다 비록 팜플렛 저자가 되고 말았지만 자신이 쓰려 했던 이야기는 결말이 불행하고 묵직한 자연주의 소설이었음을 고백한다.
언어가 타락한, 아니 온 세상이 미쳐 날뛰는 시대이기에 언어는 부득이 정치적 수단, 계몽의 도구로 활용될 수밖에 없다며 개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가 오히려 자신의 글에 생동감을 불어넣었다고 믿는다.
맥없는 책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300쪽)
그러니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에 매달리는 사실에 의기소침하지 않았다. 그런 인생 역정에 여한이 없는 듯하다. 글쓰기라는 재능을 통해 자신을 오롯이 의식의 근대화와 인간화의 제단에 바친 셈이다. 제물을 받아든 신은 인류에게 상당한 분량의 선물을 내렸다. 그런데 오늘 여기 한반도까진 미치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이 책은 그런 오웰의 삶과 글쓰기의 정수를 담은, 한 권으로 요약한 조지 오웰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