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읽으며 감정이입도 잘 하고, 잘 웃고, 또 잘 우는 편이다. 그런 나의 감정의 갈증을 잘 충족시켜 준 책이었다.
작가님이 문장을 정말 예쁘게 쓰신다. 누군가에게는 거추장스럽고 장식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게 글 쓰는 방법은 배우고 싶었다.
단편들이 너무 좋았다. 너무나도 좋아서 내 죄책감을 건드릴 정도로. 동시에 좋은, 아니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게 해줘서 고마웠다. 오랫동안 다시 보고 싶은 책이었다.
입동
: 우리는 누구에게 "꽃매"를 던진 적이 없는가
그 꽃이 마치 아내 머리 위에 함부로 던져진 조화처럼 보였다. 누군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악의로 던져 놓은 국화 같았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위로"를 너무 쉽게 던지고 있던 건 아닐까. 오히려 위로라는 명목으로 그만 울라며 그만하면 되었다고 "꽃매" 던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돌아보게 되었다. 나의 위로가 누군가에게는 그만 하라는 타박으로 들릴 수 도 있었겠구나.
노찬성과 에반
: 나의 쾌락은, 타인의 삶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
절벽 아래서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불길이 치솟았다. 찬성은 갓길 주변을 초조하게 서성였다. 저기, 아직 사람이 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 같은데. 주위에 모여든 구경꾼들은 ‘어디서 자꾸 맛있는 냄새가 난다’고 했다. 찬성이 어른들을 향해 ‘도와달라’ 소리쳤다. 그러면 어디선가 할머니가 나타나 입술에 손을 대며 “쉿” 소리를 냈다. “네가 울면 … 손님들이 깨잖니.”
그 누가 10살 어린 아이를 강아지의 목숨 대신 순간의 쾌락을 선택했다고 욕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건 그 아이는 얼마나 가슴 깊이 지고 갈 죄책감이지는 않을까.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과거를 묻어야만 하는 그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그 현실을 어린 손자에게 강요해야 하는 할머니는 얼마나 가슴이 찢어질까. 그리고 돈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하는가 ..
현실, 그리고 돈에 대하여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돈이 중요한 이유는 어쩌면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일텐데.
건너편
오래전, 이수가 현관을 나설 때면 ‘저 사람 저대로 사라져버리면 어쩌지, 길 가다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떡하지’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났다.
-이수야.
-응.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빼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거 같아.
그때서야 도화는 어제 오후, 주인아주머니를 만난 뒤 자신이 느낀 게 배신감이 아니라 안도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수 쪽에서 먼저 큰 잘못을 저질러주길 바라왔던 것 마냥. 이수는 이제 .. 어디로 갈까? 도화가 목울대에 걸린 지난 시절을 간신히 누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읽으며 남자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지금 나의 사랑이 미래에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한 때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했다. 그 누군가가 그냥 먼지처럼, 연기처럼 사라져 버리면 어쩌지를 매일같이 진심으로 걱정할 만큼. 그런데 지금은 아니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마음이 사라져서 뿐일까. 그때와 상황이 달라져서는 아닐까. 그 사람과 내가 서로 다른 세상에 있어서, 우리의 현실적인 차이가 커서, 내가 그 사람에게 아까워서와 같은 현실적인 이유가 없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금을 살아가는 청춘들이 정말 많이 고민했던 문제일 것 같다. 그치만 이러한 현실적인 사랑을 마냥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을까.
풍경의 쓸모
: 현재를 부끄럽지 않은 순간들로 채우는 것이 미래의 나를 구성한다.
사진 찍을 때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무척 평범한 사람,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날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싶다.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 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
작품에서 ‘풍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작품을 읽고 난 직후에는 깨닫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선명하지 않을 뿐더러 내가 정의한 게 작가의 의도에 부합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내린 해답은 작가는 '풍경'을 통해 사치와 현대 문물, 행복, 과거, 그리고 상반된 진실을 가리는 허울인 현실 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느꼈는 지 궁금하다.
다만 한 가지 인상 깊었던 건 현재의 순간이 내 얼굴에 스며들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비록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겠지만 평생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가리는 손
: 나에게 소중한 이가 나의 기대와는 다른 사람이었을 때
가끔 아이 몸에 너무 많은 ‘소셜’이 꽂혀 있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온갖 펴안과 해명, 친밀과 초조, 시기와 미소가 공존하는 ‘사회’와 이십사 시간 내낸 연결돼 있는 듯해. 아이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그 억압과 피로를 경험해본 터라 걱정됐다.
본문 중
SNS에 대한 화자의 생각이 내 생각과 너무나도 유사해서, 오히려 더 깊어서 기억에 많이 남았다.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이 입가에 천진한 흥미랄까, 아는 체랄까 묘한 기운이 어린다.
-틀딱?
그리곤 아차 싶은지 재빨리 미소를 거둔다. 마치 소중한 비밀처럼.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보물인 양 얼른 감춘다. 나는 아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아이가 이상한 말을 뱉어서가 아니라 방금 저 표정을 이미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아서.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본문 중
이 부분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타인에게 상처받을까 걱정하던 나의 소중한 존재가 도리어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마주하면 어떡해야 할까. 그리고 그 대상이 혼자 애틋하게, 그러나 넘치는 사랑으로 키웠던 내 아이라면, 아이의 부족함을 마주했을 때 부모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내가 보여주고 싶은, 보여 주었다고 믿은 세상 외에 다른 세상에 아이가 존재함을 깨달았을 때에는 바로잡아야 할까, 아니면 그 아이의 인생이니 존중 해 주어야 할까.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명제의 허용 가능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내가 아이를 가져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었다.
실제로 독서 모임에서도 어머니들의 최애 소설 중 하나라고 한다 ㅎㅎ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시리가 되물었다.
-어디로 가는 경로 말씀이세요?
-…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죄송해요. 잘 못 알아들었어요
-…
시리가 사용자의 침묵에 호응하는 일은 드문데 이상했다. 그것도 연거푸 세 번이나 그러는 게. 어쩌면 저 먼 데서 ‘누군가의 상상을 상상하는’ 인간이 이런 일을 예상하고, 프로그램 안에 ‘걱정’을 이식해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상상을 구현하는 일을 하는 나에게, 이 말을 꽤 깊이 와 닿았다. 나도 저런 위로를 건넬 수 있는 개발자가 되어야지.
나는 당신이 누군가의 삶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린 데 아직 화가 나 있었다. 잠시라도, 정말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생각은 안 했을까. 내 생각은 안 났을까. 떠난 사람 마음을 자르고 저울질했다.
그런데 거기 내 앞에 놓인 말들과 마주하자니 그날 그곳에서 제자를 발견했을 당신 모습이 떠올랐다. 놀란 눈으로 하나의 삶이 다른 삶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려졌다.
그 순간 남편이 무얼 할 수 있었을까 ….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가장 여운이 깊은 단편이었다. 그래서 제일 마지막에 배치하지 않았을까
정말 많이 이입하며 읽었다. 나는 사랑하는 이가 다른 이를 구하다가 죽었으면 그냥 화자처럼 그를 원망했을 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히 그걸 믿고 있었고, 남겨질 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에 정말 많이 화가 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읽고 나니 그의 선택을 존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가 한 것은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에 뛰어 든 것이었으니. 오히려 원망해야 할 것은 목숨을 저울질 한 내 부끄러운 신념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