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블로그 전체검색
말랑말랑한 힘

[도서] 말랑말랑한 힘

함민복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4점

 

  발가락 사이사이 빈 틈 없이 메우다 빠져나가는 부드러움. 장딴지를 단단히 잡아주는 힘. 찰흙을 만지작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촉.

  함민복 시인의 표현처럼 '맨발로 지구를 신(詩 <숭어 한 지게 짊어지고> 부분)'을 수 있는 데가 바로 뻘이다. 물구나무서면 지구를 드는 것과 같다는 생각은 우스갯소리에 가깝지만, 뻘에 두 발을 묻으면 거대한 신발을 신은 꼴이라는 시인의 생각은 순수한 상상력이다.

  함민복 시집 ‘말랑말랑한 힘’을 구입한 이유를 묻는다면, 오직 한 가지 함민복이란 이름 때문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가 추구하는 시세계를 동조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시 <눈물은 왜 짠가>의 여운이 끝이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머릿속에서 한참을 굴려야 하는 모호한 시어가 아닌, 일상어로 이야기하듯 써내려간 시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직구( 直球 )로 가슴에 와 닿았다. 오래 전에 일으킨 파문은 아직도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설렁탕 투가리의 부딪침,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시인은 급속도로 변모해가는 도시 문명을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시에서의 삶이란 벼랑을 쌓아올리는 일(詩 <옥탑방> 부분)'이다. '메주 띄울 못 하나 박을 수 없는 / 쇠기둥 콘크리트 벽안에서(詩 <감촉여행> 부분)' 살고 있다. 밤을 밝히는 네온사인 십자가를 바라보며 '비바람에 썩는 (詩 <그리운 나무 십자가> 부분) 나무 십자가를 그리워한다. '수평이 수직을 다 모방하게 되는 날 / 온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탑이 되고 말리라(詩 <김포평야> 부분)'. 이처럼 수직은 도시를 상징한다. 빌딩, 빌딩 속의 기둥, 엘리베이터, 신호등, 골목골목 전봇대까지 수직을 향한다.

  이와 상반되는 수평, 자연을 살펴보자. '딱딱한 놈들도 부드러운 놈들도 / 제 몸보다 높은 곳에 집을 지은 놈 하나 없(詩 <뻘 밭> 부분)'는 뻘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을 만드는 법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 함부로 만들지 않는 법을 펼쳐 보여주는(詩 <딱딱하게 발기만 하는 문명에게> 부분)' 곳이다. '흔들리는 길 위에서 길은 더 흔들(詩 <푸르고 짠 길> 부분)'리는 바다가 되기도 하는 뻘.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詩 <뻘> 부분)'주는 뻘.

  열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뻘이라고 부르는 곳을 가본 적은. 정오에 도착한 만경강 하구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손등으로 차양을 만들어 멀리 내려다보면 바다로 짐작되는 부근이 소리 없이 넘실대고 있었다. 반바지로 갈아입은 선발대 몇은 성급히 뻘에 빠져 들어갔고, 미처 준비를 못한 사람들은 긴바지를 높이 걷어올렸다. 내 또래 아이들은 속옷 차림으로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서는데, 나는 성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뻘과 늪이 사촌지간으로 여겨졌다.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머리끝까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죽어도 친구들에게 겁쟁이가 되기 싫었던 나는 울상인 채 발을 내딛었으나, 머잖아 뻘과 늪은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임을 깨달았고, 1초 대기조였던 눈물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나는 뻘에서 유영하는 갯지렁이와 다를 바 없었다.

  사람들은 뱀을 보면 놀라곤 하는데, '사람들을 볼 때마다 / 소스라치게 놀랐을 뱀, 바위, 나무, 하늘(詩 <소스라치다> 부분)'은 생각하지 않는다. '엄청난 수직을 경험해 보셨으니 // 몸 낮추어 // 수평으로 흐르실 수 있는(詩 <물> 부분)' 물을 '하늘로 올라가는 수증기의 길에 속도를 가하고 / 땅으로 내려오는 비의 길을 어지럽혀(詩 <큰 물> 부분)' 폭우로 쏟아지게 만든다. 우리가 물길을 막아놓고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라고 말한다. '소리에 어른이신 저 큰 말씀 / 무슨 뜻인지 모르겠(詩 <천둥소리> 부분)'다고 말한다.

  이 시집은 자연의 구성원이 아니라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인류에 대한 경고 메시지이다. 인류는 드넓은 뻘을 육지로 만들어 수직 세계를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나, 자연은 수직을 수평으로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있다. 왜 우리는 이 사실을 망각하려 애쓰는가. 딱딱하게 발기만 할 때가 아니다.

  '하늘 길을 가면서도 무슨 생각 그리 많았던지 / 함부로 곧게 뻗어 올린 가지 하나 없(詩 <감나무> 부분)'는 작품으로 채워진, '수만 번 꾸렸다 폈다 했을(詩 <보따리> 부분)' 시인의 보따리. 내 보따리인 양 쉽게 풀어놓았으나, 쉽게 묶을 수가 없다.

 
취소

댓글쓰기

저장
덧글 작성
0/1,000

댓글 수 0

댓글쓰기
첫 댓글을 작성해주세요.

PYBLOGWE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