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은 영화였습니다만, 이 영화 자체에 대해 사전정보를 가지고 봤을 경우에 괜찮은 영화이며, 모르고 봤을 경우 완전 깜놀할 영화입니다. 사실, 개봉관 자체가 적어서 이 영화를 모르고 우연히 예매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심심한 애도를. 어느정도 각오가 필요한 영화입니다.
우리나라에 좀비 바이러스가 발생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가지고 이루어진 시간순으로 배열된 여러개의 단편 영화 모음입니다. 단편으로 에피소드를 토막씩 던져주는 방법의 장점은 모든 이야기를 다 설명하느라 진을 뺴지 않아도 되며, 관객들에게 다양한 꼭지를 던져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영화 자체도 상당히 특이해서, 혼을 쏙 빼놨는데 엔딩 크레딧에서도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장면이 있더군요. 배우 홍영근, 감독 홍영근, 무술감독 홍영근, 그 외 각종 엑스트라. 전체 단편이 6개였는데 무려 다섯 편에 모두 출현 하시더군요. 정말 힘들게 찍었다는 반증이 엔딩 크레딧에 그대로 올라오니 영화가 자연스레 까임방지권을 획득해 버려 아쉬웠던 점도 훌훌 털어버리게 되더군요. (하지만 영화 원본 자체에 있던 대사 더빙 문제는 짚어야 할 듯^^;)
* 이하 스포일러 주의
사실 스토리까지 리뷰하는 경우는 많지 않은데, 이 영화는 보고싶어도 볼 수 없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간략하게나마 적어봅니다. 하지만 스틸 컷은 너무 호러스러워서 차마 함께 담지 못했습니다; 덜덜덜. 영화의 시작은 한국계 생물학자가 만들어낸 약물을 중앙아시아에서 불법으로 임상실험을 하다 약의 부작용으로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가게 된다는 짧은 인트로에서 시작하게 됩니다.
1.틈사이
제목처럼 틈 사이사이에 신체가 끼여가며 비정상적인 상처를 입고 좀비로 변해가는 단편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 쫓기는 공포를 상당히 잘 연출해냈으나, 스토리적인 설명이 너무 적어서 좀비란 무엇인가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만 있는 공간에서 좀비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건, 뭐땜에 감염된겨; 셀프-좀비화 한건가;; 사실 본격 호러영화가 아닐거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피가 철철흐르는 공포를 제대로 잡아내서 깜짝 놀랐던 시작이었습니다.
2.도망가자
남자친구가 반좀비가 되자, 그를 떠나지 못하고 같이 좀비가 되어 지능 퇴행을 겪다 거리로 나가 함께 사람들에게 맞아죽는 내용입니다. 능숙한 좀비 연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만, 다른 단편들에 비해서는 아쉬운 느낌입니다.
3. 뼈를 깍는 사랑
좀비가 된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이고, 피와 수면제를 섞어 주사해서 그래도 살아있는 어머니를 조금이라도 더 옆에 잡아두려는 딸의 사랑을 그린 단편입니다. 약간 어눌한 딸과 달리 좀비가 되어 공격성밖에 남지 않은 엄마의 대조되는 모습이 애절합니다. 영화의 카피라이트와 가장 부합하는 단편인 것 같네요.
4. 백신의 시대
자신이 퍼뜨린 바이러스를 잠재우려는 생물학자와 돈을 벌기 위한 국제적인 제약회사의 대결구도를 그린 편입니다. 구성이 어째 히어로물 같다고 생각하셨다면, 맞습니다. 많은 효과가 들어가진 않지만, 액션씬이 꽤 박진감있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매력있고, 서로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단편들 중 가장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화입니다. 여자좀비 2에 남자좀비 6 ^_ㅜ
5. 그이후...미안해요
좀비였던 사람들이 백신으로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게 된 후, 그들의 삶을 그린 편입니다. 예전에 좀비였었던 악몽이 밤마다 그들을 덥치고, 세상은 그들이 아직도 좀비인 것처럼 색안경을 끼고 보며 그들에게 자리를 주지 않습니다. 그 와중에 예전에 자신이 의식이 없던 상태에서 덥쳤던 피해자의 유족은, 복수를 하려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과거때문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죽음으로서야 그 삶을 끝냈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이 가장 좋았습니다. 나머지 얘기들은 좀비라는 키워드에서 상상할 수 있고, 끌어낼 수 있던 소재였다면 이 부분은 그 상상을 한 단계 넘어서 보여줬거든요. 하지만 대사가 너무 연극적이라서 좀 아쉬웠습니다.
6. 페인킬러
혼자서 노트북에 이제까지 나왔던 다섯개의 단편을 마감시간에 쫓겨가며 쓰는 작가의 모습이 나옵니다. 시간적으론 짧았지만 쇼킹한 마무리였습니다. 앞에서 있었던 단편을 한 번 더 돌아볼 여유를 주면서, 그 모든게 상상이었던 것일까-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나타난 경찰의 총에 관통되어 죽어버리는 작가의 모습으로 영화는 진짜로 끝이 납니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이었을까 싶은 여운을 주면서도,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 페트병과 이어진 관으로 오줌을 누고, 링거를 달고 글만 써대는 초현실주의적인 마감의 공포가 정신을 확 들게 하네요.
보고 나서 인디는 인디~ 라고 외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개그는 개그일뿐 따라하지 말자~ 풍으로요. 참신한 시도는 좋았고, 상당히 인상 깊은 영화이기도 했지만 일반 관객과 소통하려면 좀 더 시간(과 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도 메이저가 되는 세상인데. 어쩌면 희망이 있을 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