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나면 뭔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내게 있는 모양이다. 몇 년 전부터 리뷰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런 강박은 더욱 심해졌고.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책의 진경을 맛보는 일에서는 거리가 멀어지고 거기서 내가 무엇을 얻어야할 지에 매진했다.
저자의 전작인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ㆍ사회제도ㆍ법ㆍ종교를 이해하는 수단으로서 라틴어의 실체를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기대만큼 새로 알게 된 것도 깨달은 것도 없었다. 생각해보니 세상에 어느 언어가 만만하겠으며 더구나 난해하기로 정평이 난 라틴어를 책 한 권으로 이해하려 든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래서 이번에는 저자가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춰 읽기 시작했다. 생각을 바꾸고 나서야 비로소 저자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천주교 사제이기도 한 저자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죽어간 신의 모습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중해 지역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익숙한 이야기였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기독교를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고 말한다. 이집트에서도 삼위일체 신을 숭배하고 최후의 심판과 인간의 불멸성을 믿었으며 성스러운 모자를 숭앙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자칫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들의 설화를 차용했다는 말로 이해할 여지도 있어서 사제의 발언이라고 하기엔 놀랍다.
저자는 이어서 “신이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필요로 할 뿐”이라며 “불의한 자가 호의호식하고 정의로운 자가 억압과 핍박을 받는 현실 속에서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는 인간의 꿈이 번번이 미완으로 그칠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천국과 지옥, 그리고 그 심판을 주관하는 신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한다. 이 말 또한 신과 그의 심판으로 이루어지는 천국과 지옥 또한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으로 비칠 수 있어 앞선 발언보다 더욱 놀랍다.
저자는 바티칸 변호사로서 가톨릭의 핵심에 머물면서 유럽 교회의 웅장함과 화려함 속에 종교적 거룩함 뿐 아니라 그에 못지않은, 아니 오히려 그보다 큰 인간의 세속적 야망이 들어있는 것을 읽어내며 과연 신을 예배하는 장소가 이토록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의문을 던진다. 저자는 결국 인간의 세속적 야망이 종교적 본질과 종교적 거룩함을 넘어선다면 창조주이자 세상을 운영하는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보다 나을 것이 없고 성경의 모든 기록은 지역 설화와 아무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며칠 전 내로라하는 교회들이 모여 성가합창제를 벌인 영상을 보게 되었다. 합창단 수준이나 반주를 위한 오케스트라 규모가 어지간해서는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화려했다. 교회마다 행사를 위해 전력투구한 것이 여실히 보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영예로 알고 최선을 다해 준비했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이 그런 내 생각을 바꾸어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영상을 보면서 그게 교회의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왜 저런 열정과 자원을 저런 곳에 낭비하는지 싶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자는 한 세기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밀라노 대성당을 5백년이나 걸려 지은 것을 풍자해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대성당’이라는 말을 ‘끝이 보이지 않는 일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관용어’로 쓰인다고 소개한다. 이와 같이 웅장한 교회와 화려한 예배의식이 기독교문화의 우월성을 보여줄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교회의 본질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탄식하는 저자의 마음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 저자는 “수도복을 입었다고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지 않는다. 종교는 평범한 사람에게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인 옷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생활 자체가 그를 종교인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며 그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오금을 박는다. 그러니 사회가 교회와 멀어지게 된 것은 교회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결과라는 저자의 지적은 참으로 옳다.
전대미문의 재난이 된 코로나는 사회의 모든 부분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비대면예배가 일상이 되면서 줄어든 교인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최대로 회복해봐야 예전의 2/3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그러니 대면예배가 금지될 때 사활을 걸고 이에 맞선 교회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고 그들이 내세우는 ‘종교의 자유 억압’이라는 프레임을 벗겨낼 수 있는 뾰족한 대답도 찾기 어렵다.
종교의 자유에 대해 ‘바티칸에서 종교법을 전공한 바티칸 변호사’인 저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종교의 자유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실현의 자유’ 둘로 나뉜다. ‘신앙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로서 신앙을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포기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고 이에 더해 신앙을 갖지 않을 자유까지 포함한다. 반면 ‘신앙실현의 자유’는 상대적인 자유로서 종교의식, 종교교육, 종교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말한다. 다만 종교의 상대적인 자유는 다른 사람의 기본권이가 사회공동체 질서를 해치지 않는 조화로운 범위 안에서만 인정된다.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국민의 모든 자유는 필요한 경우 제한할 수 있는데 앞서 말한 절대적인 권리인 ‘신앙의 자유’를 제한한다기보다 ‘신앙실현의 자유’가 제한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칸트웰은 행인이 오가는 거리에서 가톨릭을 부정하는 주장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틀어 치안방해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았고 연방대법원까지 갔다. 판결에서 판사는 “수정헌법 제1조 ‘종교의 자유로운 행사’ 조항은 믿는 자유(freedom to believe)와 행동의 자유(freedom to act)라는 두 가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믿는 자유는 절대적이지만 행동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전혀 그렇지 않다. 모름지기 행동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해 규제의 대상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이것은 종교행사의 권리가 절대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다룬 유럽의 헌법학 서적에서도 감염병 상황에서는 국가권력에 의해 종교행사를 일시적으로 금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저자는 행간을 통해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모와 가족의 존재가 고통이었다고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내비치고 있다. 저자는 한편으로는 그 문제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려움에서 구해주시기를 기도했다고 고백한다.
“어쨌든 부모님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문제에 불평하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에 가고 유학하던 중에도 내내 전장 속에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냉정하게 구분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사람이었다.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실은 내 마음과 달랐고 고통스러운 시기에 기댈 가족이 없다는 사실이 참 마음 아팠다. 그러나 부모님을 비롯해 마음먹고 행동하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에 속했다. 그 앞에서 나는 불평만 하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자문하게 되었다. 그저 나의 일상을 살자, 불평과 탄식은 이 순간 내게 필요 없는 것이니 한숨과 함께 날려 보내자 하면서 그 탄식과 한숨이 기도가 되었다.”
살아가노라면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우리는 그 괴로움을 줄이고자 삶의 대소사부터 존재론적 문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두고 기도로 청한다. 하지만 저자는 기도에 앞서 자기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면 올바른 기도에서 벗어나게 된다면서, 그것을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묻고 성찰하기를 권면한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막상 문제에 닥치게 되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막막할 때가 대부분이다. 아니, 문제가 무엇인지조차 모를 때도 허다하다. 그래도 기도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나는 기도부터 시작했다. 내 기도가 벽에 대고 떠드는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면 모를까 들어줄 상대가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기도를 듣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중구난방인 기도조차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주신다는 것을 나는 체험을 통해 수없이 확인했다.
저자는 책의 첫머리에서 기독교 유적지를 처음 보게 되었을 때 글과 사진으로만 보던 유적지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마음이 설렜지만 20년쯤 지난 후 다시 찾았을 때는 건물이나 과거의 자취가 아닌 현재 그곳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살아가는 모습, 일상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삶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보는 게 아니라 그들 삶 속에 투영된 내 삶을 보는 일이며,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거나 풀길이 없는 문제를 내려놓는 힘을 얻기도 한다고 고백한다.
신산한 젊은 시절을 보낸 사제로서 그의 고백은 인간적으로 신학적으로 많은 울림을 준다. 이전과 같이 책에서 어떤 지식을 얻어내겠다고 생각했다면 많은 부분을 그저 흘려보냈을 것이다. 강의록을 책으로 풀어낸 것이라는데 마치 직접 강의를 듣는 것처럼 저자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잔잔하고 따듯하게 풀어내려간 그의 글만으로도 그의 성품을 짐작할 만하다. 분노와 격동으로 풀어낼 이슈도 적지 않았는데 말이다.
내용 중에 하나 바로잡을 것이 있다.
저자는 중동이라는 말이 유럽의 시선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유럽의 관점에서 본 극동과 근동의 중간지역을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연구를 위해 그 지역에 한동안 머물면서 그런 관점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으며 그러면서 이슬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슬람 달력이 음력을 기반으로 하다 보니 새해는 매해 달라지는데 이슬람은 대체로 8월에 새해를 맞는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사용하는 헤지라력은 일 년이 354일로 그레고리력보다 열하루가 적다. 음력도 일수가 적지만 윤달이라는 장치를 마련해 이를 바로잡는다. 그러나 헤지라력에는 그런 보정 장치가 없다. 그래서 매년 새해 첫 날인 무하람 1일은 매년 열하루씩 당겨진다. 내가 사우디에 부임한 2009년에는 무하람 1일이 12월 18일이었고 올해인 2022년에는 7월 30일이었다. 2042년이 되면 다시 12월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