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애잔한 소설 한권을 읽었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글쓰기에서 찾은 작가, 앨리자 수아 뒤자팽은 프랑스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나 프랑스와 스위스를 오가며 자랐다. 13세때 어머니의 나라인 한국을 방문한 뒤 외조부가 그녀의 아버지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자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며 혼란을 겪었다고 한다. 예민한 10대의 소녀가 가족의 일원으로 반기지 않은 존재의 자식이라고 여겨지면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성찰로 글쓰기를 택했다고 한다.
바로 소설 [속초에서의 겨울]은 자라면서 겪었을 심리적 고민과 어머니에 대해 참아내야했던 심적 갈등을 마치 한편의 90년대 한국소설을 보는 것처럼 아련하게 묘사되어있다. 사실 뒤자팽은 프랑스어로 이 소설을 썼고 그녀 자신이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구사한다고 했고 번역 또한 그녀의 문체가 많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속초라는 공간속에서 바닷물내 나는 문장들이 느껴지는 건 그녀가 모국어를 잘 구사하기 때문이리라.
소설 속 나는 혼혈로 동네 아낙들의 온갖 뒷담화의 주인공으로 살아왔다. 속초의 펜션에서 일하며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생선장수인 엄마와는 일주일에 한번만 함께 지낸다. 엄마앞에서는 뭐든 꾸역꾸역 입으로 집어넣는 나를 상상하면서 나도 그런 나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엄마와 딸의 애증섞인 관계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소설속의 나는 아버지가 없는, 모습속에 혼혈이 드러나는 터라 훨씬 외롭고 힘겨웠을 것이다. 뒤자팽이 외조부에게 받았던 상처가 그녀의 무릎 뒤편의 생채기와 다르지 않음을 표현한 대목일거라 상상해본다. 어느 겨울에 노르망디가 고향인 한 남자가 속초를 찾았다. 만화를 그리는 남자! 그의 펜끝에서 그려지는 한 여자의 실루엣은 나에게 무척 인상적이며 기대감을 갖게 한다. 남친이 있으나 이미 오래된 연인으로 이별을 해도 별 감흥이 없는 그런 관계가 지속되며 나는 일상적인 일과를 보낸다. 펜션의 손님중에는 성형수술로 붕대를 감은 여자와 그녀의 남친이 등장하고 나의 남친은 성형을 해서라도 모델에 입문하는 것이 꿈이다. 엄마의 언니인 이모 또한 나에게 성형을 강요한다. 물론 엄마는 안해도 예쁘다고 말하지만, 여기서 성형이란 혼혈의 느낌을 지우는 뭐 그런 엄청난 피지컬에 대한 수모일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이국의 남자에게 끌리고 그의 펜끝에서 그려지고 싶어한다.
그것은 욕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욕망일 수 없었다. 아니었다. 프랑스인, 이방인인 그에게는, 아니, 확실했다. 그건 사랑도 욕망도 아니었다. .....나는 그가 나를 그려주길 바랐다.
지금의 나는 진짜 나인지, 과거의 나는 그럼 가짜인지, 나는 새로운 나로 탈바꿈하고 싶은 건지, 그럴려면 어떤 과정을 겪어내야 하는지, 작가의 미세한 심리를 읽을 수 있는 장치들이, 언어들이, 일상어로 표현된다. 속초의 풍경과 어시장의 짠내가 오징어순대와 복어회와 막걸리로, 진한 냄새를 풍기지 않고 잔잔하게 쓰여지는 단어들이 작가의 심성과도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지금은 프랑스도 한국도 아닌 중립국 스위스에서 정착하며 글쓰기에 매진한다고 한다. 소설은 나에게 불안한 마음을 애쓰지 않게 해주는 그런 쟝르이다. 충분히 도움을 받는다고 할까. 나다운 인생을 시작하는 그 누구라도 읽으면 좋겠다. 서늘한 소설, 이 겨울에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