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세번째 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의 순간들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으며, 지나간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삶의 일회성이야말로 우리에게 삶의 각 순간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 두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p236~237)
난 참 지금껏 별 일 없이 살고 있다. 바쁘다가도 금방 쉴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고 특별히 간섭을 받거나 주변의 골치아픈 이웃도 없고 나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사람도 없으니 별 일 없이 잘 살고 있는게 맞다. 그래서 그간의 안부를 물으면 별 일 없다라는 말로 금방 답한다.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싶다.
친구도 많지 않고 모임이나 조직구성원에서 빠져 나온 지 1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나도 잊혀질대로 잊혀진 인물이 되고 말았다. 머나먼 낯선 나라에서 조금은 익숙한 척 살고 있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으려니 이제는 좀이 쑤셔서 슬슬 움직여볼까, 변화를 줘 볼까 고민도 하고 적극적인 모습으로 연출하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그런 나에게 자극제가 된 책이 바로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니깐 무슨 자기계발서인양 착각할 수 있겠다. 이 책을 읽으면 바로 성공의 길이 보인다거나 지루한 일상에 소낙비와 같은 에너지를 내려준다거나 하는 그런 비책을 얻을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상황, 즉 한시도 확실하지 못한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기에 가질 수 밖에 없는 시련과 환멸, 운명과 죽음이라는 개념을 감정적 오열없이 냉정하고 건조하게 써 내려간 저자의 실제 이야기이다. 정신의학자라는 직업을 가진 저자의 리얼한 터치는 매 순간 별 일 없이 살아가는 일상을 별 일 있게 만들어 가기를 독촉하는 듯 보였다. 별 일 없다는 것은 안주하는 편안한 삶이겠지만 별 일 있게 만드는 것은 괴롭고 암담한 일상으로 가라는 것이 아니고 보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위해 노력하라는 충고로 받아들인다면 이 책의 가치를 반은 이해한 셈이다.
폴란드의 구도시 크라카우(크라코프)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시비앵침, 독일어로는 그 악명높은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수용소시설 그대로의 모습으로 박물관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제 가보면 그 스산하고 음침한 기운에 맥이 빠지는 것을 몸으로 느낀다. 당시의 상태 그대로 수용소 건물들이 끝없이 줄지어 서 있고 주위를 에워싼 전기 쇠창살, 교수대, 처형장(총알의 흔적이 벽면에 그대로 있다), 지하로 들어가는 가스실, 소각장, 밖에는 높디 높은 굴뚝이, 소각장 내부 검게 탄 벽면과 시신이 수없이 드나들었을 화로, 그 위에 누군가 올려둔 청초한 꽃 몇송이만이, 각자의 방식으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흐느낌과 한숨소리만이 그 곳을 지키고 있다. 제국의 광기가 용솟음치던 시절, 몸과 마음을 죽이며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들의 슬픈 운명의 이야기가 가슴을 찌르면서 읽혀지던 날, 내 어찌 별 일 없음에 짜증을 내고 까탈을 부려야만 할까 하는 반성과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과 통찰을 구도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도 줄곧 생각하고 살아야 함을 알았다. 유한한 삶이 언제나 계속될 것이라 착각하며 오늘이 어제인 듯 내일도 오늘같을 것이라 스스로 폄하하며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깊은 반성을 해본다.
아우슈비츠로 들어가는 입구 앞 기차에서 내린 수많은 사람들은 낯설지만 안도감도 느꼈다. 군인들이 그들을 줄지어 세웠는데 성별 따로, 아이들 따로, 다쳤거나 병들었거나 늙었거나 하는 사람들 따로, 그렇게 줄지어 세우면서 좌우편의 갈림길로 나누어 보냈다. 한쪽은 삶의 길, 다른 쪽은 죽음의 길이었다. 순간에 갈린 운명앞에서 산 자들은 발가벗겨졌다. 어리벙벙한 상황이 이어지는데 그 누구도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돌발적인 군인들의 행동에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이제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다. 치욕과 좌절속에서 잠자는 시간, 자신만의 시간이 되는 그 시간이 가장 좋았다는 말, 굶주림과 갈증의 연속에도 자질구레한 대화의 순간만큼 위안이 되는 일이 없었다는 말, 육신의 영달과 정신의 안위, 둘 중 어느 것이든지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 전자를 위해 선택한 수용자들, 그들을 카포라 부른다. 우리 식민시절을 생각하면 쉽다. 우리 내부의 앞잡이들이 바로 그들과 같다. 정신과 의사였던 저자는 한 카포의 정신치료에 도움을 준 결과 수용소내 요양소에서 진료를 돕는다. 진료라고 할 수도 없었지만 저자에게는 잘 된 일이었다. 그렇다고 사정이 좋아진 것은 아니었지만 수용소에 도착한 날 가슴팎에 넣어둔 자신의 원고들을 잃어버린 그에게 한가닥 삶의 용기가 생긴다. 변변찮은 종이조각에 자신의 글을 정리하고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겨두는 작업들 - 아내와 지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음을 회상하는 내용 (아마도 수용소에서 얼마안있어 죽은 듯하다) - 그 작업들은 그에게 삶의 지푸라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는 후자의 인간이었다.
아무리 절망스런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에-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p186)
의미를 찾는 개념인 로고테라피의 실제적인 성과와 더불어 빅터 프랭클은 정신 의학분야에 자신의 수용소 체험과 미국의 개입이후 자유를 얻었을 때 급박하게 다가온 현실에 적응이 안되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개선하고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발가벗겨진 인간 실존의 본질과 해체된 자아의 회복을 온갖 핍박과 공포속에서 견뎌냈고 조각난 삶의 한 시절을 바로 세우려는 의지속에 진정한 삶의 의미는 빛이 난다.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절대 안된다. 그거 아는가. 독일인들 핏속에는 자책감이 숨어 있다. 나치식 인사, 손을 들어 예를 표하는 행위에 실제 벌금이 부여되고 얼마간 네오 나치당의 독일내 잦은 테러에 메르켈 수상이 나서서 부끄러운 행위라고 언표했다. 그리고 그들은 빅터 프랭클의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