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ssa da Requiem by Giuseppe Verdi
" Requiem"
Leontyne Price, soprano
Jussi Bjorling, tenor
Rosalind Elias, mezzo-soprano
Giorgio Tozzi, bass
Singverein der Gesellschaft der Musikfreunde, Wien
Fritz Reiner, conductor
Wien 1959
1868년 11월 13일 이탈리아 오페라의 빛나는 작곡가인 롯시니가 파리에서 객사했다. 그 슬픈 소식을 부세토(베르디의 고향)에서 들은 베르디는 밀라노의 출판사에 연락하여 그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며 1주기 추모식때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고 편지를 쓴다. 음악의 나라답게 최고의 작곡가들의 연작으로 레퀴엠이 기획이 되고 베르디는 그 중 <리베라 메>를 작곡하게 된다. 일년여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준비가 완료된 상황에서 합창단과 관현악단의 스케줄이 겹치고 소통의 불발로 일체의 계획이 안타깝게 좌절되는데, 이 때 베르디의 <리베라메>악보도 세월의 먼지속에 묻히는 신세가 된다.
당시 베르디는 온갖 욕설과 함께 분노를 표현했다. "철없는 애들같으니, 조국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를 애도할 계획을 무너뜨리다니, 정신이 썩은 짓이며 이는 조국에 대한 애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분개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듣는 베르디의 [레퀴엠]은 어떻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을까.
1873년 오페라 [아이다] 재연차 나폴리에서 작업중이던 베르디는 또 하나의 부고소식을 접한다. 그가 가장 존경하던 시인 알렉산드로 만조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민족성향이 강한 베르디의 성향과 만조니의 온건하면서도 뜨거웠던 애국정신이 일상과 작품에 일관성있게 반영되는 것에 일찌기 경의를 표했던 베르디는 출판사 리코르디와 연락을 취하며 만조니를 위해 일년 후 미사를 써서 바칠 생각을 내비친다. 이 때 베르디는 <리베라 메>악보위에 쌓인 먼지를 털게 되고 전곡을 혼자의 힘으로 작곡하기에 이른다. 그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일년 후 1874년 5월 22일 밀라노 성 마르코 성당에서 초연에 성공한다. 고인의 영전에 연주를 바치고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에서 그의 지휘와 연주에 보러 온 사람들은 절찬을 보냈다.
베르디 [레퀴엠] 전곡을 듣기는 오늘 아침이 처음이다. 띄엄띄엄 듣던 곡이였기에 그 감동은 항상 베르디이기에 가능했던 음악들이라는 생각외 별 다른 것은 없었다. 허나 지금은 그 지점에서 조금 더 나아가 엄청난 죽음의 오페라를 들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말로 충격받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고 달리 표현할 말을 못찾겠다. 그저 위대하다는 말밖에는....베르디는 진정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올해 수많은 그의 작품들을 접하며 온갖 찬사를 들이부었지만 이 작품이야말로 베르디 완결작품이 아닐까. 9월에 들은 음악중 아니 이제껏 들은 레퀴엠들이 종교적인 색채를 갖추었다면 베르디는 그걸 넘어서 더 극적이며 더 스펙타클한 음악을 선사했다.
이미 천재성과 음악적 권위를 인정받으며 최고의 위치에 서있던 베르디는 종교적인 면보다도 지상 최대의 레퀴엠을 꿈꾸었다. 아름답고 어여쁜 천상의 이미지보다도 훨씬 장대하고 위엄있으며 오묘한 느낌의 오페라스러운 레퀴엠은 그의 예술적 의지였다. 이 작품을 듣는 내내 이건 오페라야!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부다페스트 출신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 스웨덴의 리릭테너 유시 비욜링, 소프라노 레온타인 프라이스, 메조소프라노 로잔린트 엘리아스, 베이스 지오르지오 토찌, 레이블은 1960년대 데카 레전드 시리즈, 같은 곡으로 70여회이상 다양한 버젼의 녹음이 된 바 있으니 실로 대중의 인기와 예술의 융합이 이보다 더 돋보인 곡도 없을 것이다.
위에 올린 레퀴엠 곡은 마지막 부분들이 약간 떨어져 나갔으나 전체를 듣는데 흠은 안되니 끝까지 들어보길 권한다. 음악은 입이 아닌 귀로 듣고 그 울림이 들리는대로 표현하면 가장 솔직한 감상이 된다. 그러니 이 가을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할 음반으로 추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