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면 모든 일이 꿈만 같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는 본래 예정된 자리였을까. 아니면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일까. 서늘한 바람이 때때로 상심에 젖게 하는 가을날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머지않아 반나절정도는 어둠에 내줘야 할 것이다. 눈앞은 가특이나 침침한데 기억은 신기하게도 생생하다. 나는 그들의 음악을 들으며 불온했던 그 시절, 사랑이 밥먹여준다고 굳게 믿던 낭만의 시대 참한 언니들중 참으로 참했던 그 언니를 생각해냈다. 남일이라면 마냥 웃고 넘기던 한심한 20대 초반에 그 언니는 자신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연애사건으로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을 것이다. 학과에서 일어나는 정사와 야사에 촉을 세우며 통신원 역할을 하던 한 학우에게서 시작된 참한 언니의 과거사는 일파만파 흘러흘러 급기야 나와 내 쑥맥친구들에게까지 들려왔다.
재수를 한 그 언니의 첫인상은 조용한 사람으로 보였다. 창백한 얼굴의 언니는 눈아래 주근깨가 보일 정도로 하얗고 때로는 투명한 얼굴색을 띠어 분명 수더분한 성격일 거라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그리 틀리지 않았다.
재수를 하고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 오빠가 있었다. 나는 19살에 그렇게 무섭게 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 항상 카키색 사파리 쟈켓을 걸쳤고 다리 하나를 절며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책도 없이 수업에 들어와 조용히 앉았다 나가는 사연 많을 것 같은 그 오빠는 공포 그 자체였다. 낯가림이 심했던 나로서는 그 공포와 마주 할 일은 없었지만 어쩌다 오고 가는 길에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인사만 살짝 하고 얼른 지나갔다. 그런데 그 오빠가 그 언니랑 사귄단다. 두 사람의 달콤한 연애이야기는 학과내에 잔잔하게 퍼졌고 그 오빠 군대에서 다리 다친 얘기며 그 언니 집안 사정이 안좋아 일년동안 돈 벌어 대학에 들어온 이야기는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애잔했다. 사랑의 힘일까. 그 말없던 오빠가 전공시간에 전공책을 제대로 된 발음으로 읽어냈다. 모든 학우가 박수를 쳤고 담당 교수님도 흐뭇한 미소를 보이셨으니 사랑은 사람을 확실하게 변화시키는 우주적인 에너지가 틀림없다고 굳게 믿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시간은 흘러갔고 나도 내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해 두해가 지나면서 전래동화적인 사랑이야기는 19금 퇴폐성향으로 치달았다. 참한 언니의 과거를 문제삼은 오빠의 치정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오빠는 분위기 좋은 주점에서 언니랑 술을 마셨고 술김에 서로의 과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부터는 언니의 과거 이야기이다. 데킬라가 아닌 맥주 사주며 하룻밤 함께 하자고 꼬시던 언니의 과거 남자이야기가 치정극의 시작이었다. 맥주 안마시고 그냥 갈라면 돈을 내고 가던가 아니면 치마 한번 벗어서 보여주라던 언니의 과거 남자는 흉칙한 제안을 했고 순진한 언니는 주점을 나와 여관에서 치마를 벗었다.
술김에 들은 언니의 과거사에 오빠는 분노했고 언니에게 손찌검을 했다. 이어 언니의 과거 남자 신상조사까지 마친 집요한 오빠는 어느 날 밤 언니의 과거 남자가 잘 다닌다는 주점에서 그를 기다렸다. 소주 한 병을 입에 털어넣고 쇠젓가락을 칼잡듯 잡으며 그 남자에게 협박했다. 어디까지 갔는지 솔직하게 말하라고.. 안그러면 뱃떼기에 이 젓가락을 쑤셔 박겠다고.... 내 마누라 건드리고 괴롭히면 죽여버리겠다고...
그리고 오빠의 복수는 이어졌다. 과거 남자의 바지를 벗겨 주점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히고 오빠가 마신 술값까지 계산하라고 했다.
장미여관이 부르는 <봉숙이>의 첫 소절 "야, 봉숙아.."를 은근하게 부르는 끈적함은 내 기억의 속살을 뒤짚어 놓은 듯 울컥한 기분마저 든다. 최루가스를 밥먹듯 마시며 학교 다니던 불온했던 시절에 죽도록 가난했던 연인들의 누아르격 연애를 통신원 학우에게 듣고나서 나와 내 친구들은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한편으론 언니의 과거 남자 바지 벗긴 얘기와 술값 계산 얘기에서는 뱃꼽을 잡았다.
언니와 오빠는 졸업후 함께 살았을까. 지금은 그들도 나처럼 나이들었겠지.
지하 카페의 눅눅한 습기와 담배연기가 코끝에 와닿는 장미여관의 앨범은 B급이었던 시절의 추억담같다. 그들의 모양새만큼이나 처절하게 촌스러웠던 우리들의 낭만시대!
음정 무척 떨어지는 라이브! 하지만 B급 감성에 공감하는 불온과 낭만사이를 오가던 젊은이들의 역설이 앨범속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