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기양양하길 기대하며 맞이한 2015년이 두달째 흘러가고 있다. 그저와 어제, 그리고 오늘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와 마주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 한 몸의 변화가 주변과 사회에 무슨 반동을 일으킬까만은 막가는 정치판과 이에 널을 뛰는 주요언론과 종편의 작태가 마치 70년대 그 시절 일말의 순수를 세뇌시키던 그즈음을 기억하게 하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호떡집에 불이 난 듯 빠르게 옮겨붙는 인터넷상 팟캐스트 담론들은 이젠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 그 수가 과도하게 많아졌고 치장한 듯 안한 듯 위장술이 뛰어나서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어버리기 쉽상이다. 자아상실을 불러오는 토크들이 난무하다보니 새삼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올 때도 있다. 건강한 바램보다 사회적 이즘을 무시하며 자본의 원칙에 따라 먹고 살기 위해 토론하는 분위기가 된 건 아닌지... 그곳에도 생존이 걸려있기에 광고가 늘어나길 바란다. 긴장감없이 핫한 메뉴들에 질린 지 오래되었다. 이젠 개인적으로 신선하지도 기대할 이슈도 없이 나열되는 무성의한 토크들을 걸러낼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될 시기가 되었다. 이도저도 싫어서 신경안쓰고 살면 그만이지만....
2차대전 독일 점령 시기에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지하에서 활약을 하던 프랑스 신문 <콩바>가 해방이후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곳에는 우리는 꽤 중요한 이름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활동은 가장 무력했던 한 시기를 건너는 다리가 되었고 그 다리에 힘을 실어 사회적 무지와 비상식적인 현상에 정의로움을 부여하려 노력했다. 알베르 까뮈! 그는 <콩바>의 일원이었고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킬 만한 기사와 편지를 수없이 쓰며 실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자들에게 입장을 전달했다.
"모든 공개적인 입장 표명은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위험이 있고 그리하여 나라의 불행에 부채질을 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알제리에 대한 의사 표시를 자제하기로 한 시점에서도 까뮈는 사형선고를 받은 알제리인들을 위하여 비밀리에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여기 알베르 까뮈의 두 편의 에세이를 소개하려한다. 나의 뇌를 알알이 물들였던 까뮈의 지성과 보편적인 논증을 읽어보길 바란다. 그의 반이라도 따라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습이 이토록 불안하고 불안정해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단두대에 대한 성찰]은 1957년 6월 케스틀러, 쟝 블로크 미쉘과 공동저술인 [사형에 대한 성찰]에 게재되었다. 같은 해 10월 카뮈는 프랑스인으로는 아홉번째인 최연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사형에 대한 역사적인 연대기나 고찰을 논하는 이야기는 없다. 단지 20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행해진 최악의 형벌에 대하여 간접경험의 사례와 의학적 증명을 토대로 국가가 저지르는 악행의 부당성을 섬뜩하게 논하고 있다. 범죄의 원인과 동기가 되는 가난과 알코올에 대한 국가적 책임에 대해서도 그의 논리는 일사불란하다. 당신은 가난이 개인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연일 이슈화되는 사회복지의 논란아닌 논란을 우리는 겪고 있다. 사회적 기준과 입장의 모호함을 제거하고 분명한 기준선을 구성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사형제가 폐지되지 않은 현재 사형집행유예제를 실시하고 있는 국가이다. 사형집행유예제란 형을 집행하지 않고 혹시 모를 법집행의 오류에 대비한 대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사형제의 찬반논란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실제 지구상에서 최악의 형을 집행하는 국가는 미국과 중국, 그리고 여는 이슬람국가들이다. 유럽의 국가들에서는 이 형벌이 사라지고 없지만 프랑스의 경우 1979년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 후보시절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형제 폐지 전까지 단두대형은 일반 범죄사범과 알제리 범죄인들에게 적용되어 왔다. 프랑스에서 단두대형이 사라진 건 1982년 미테랑 대통령 정부시절이다.
우리는 줄곧 역사서를 통하여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서 공개처형된 루이 16세 일가와 로베스피에르의 이여기를 문학서의 한 문장처럼 들어왔다.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는 표현으로 말이다.
사형에 대한 카뮈의 행동에 동기를 제공하는 것은 정치적 이유다. "지난 30년 동안 국가범죄는 개인 범죄를 훨씬 앞질렀다." '편파성과 교만함의 광기에 빠진 국가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형은 폐지되어야 마땅하다. / 로제 그르니에 , [단두대에 대한 성찰] 해설
[독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는 2차대전 독일 나치가 저지른 잔혹한 범행과 곧이어 명멸할 것을 강하게 전달하는 글이다. 실제 이 편지글은 프랑스내에서만 출판되었고 후에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1943년 7월과 2월, 1944년 4월과 7월에 각각 쓰여진 네 편의 편지글이다.
카뮈는 이탈리아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 편지를 쓰는 필자는 '당신들'이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당신네 독일인들'이 아니라 '당신네 나치 당원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항상 '우리 프랑스인들'이 아니라 '우리 자유로운 유럽인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 알베르 카뮈, 이탈리아어 서문
카뮈는 그 시기 연일 나치의 선전속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는 유럽의 개념에 맞서 자신의 이상을 옹호하고 있다. 피렌체, 크라크푸, 프라하, 잘츠부르크를 유럽의 이상으로 묘사했다.
네 번째 편지에서 그의 스승 쟁 그르니에가 좋아했던 전기 낭만주의 작가 세낭쿠르의 말을 머리에 인용하고 있다. 인간 실존과 부조리한 사회에 더없이 절묘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다. 그럴지 모른다. 그러나 소멸하더라도 저항하면서 소멸하자.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비록 허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필귀정이 되도록 하지는 말자.
/ 에티엔느 피베르 드 세낭쿠르, [오베르만] 중에서
다이나믹한 사회의 그물에 엉켜 주장과 설득을 펼치지 못하는 이미 나이든 세대들이 읽으면 좋겠다. 젊으나 벌써 시들시들한 청년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