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맥경화 등 혈관병으로 병원을 내집 드나들듯 하던 60대의 유쾌한 화가 졸리가 치료중 숨졌다. 며칠 뒤면 퇴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에 졸리는 병실에서 느긋하게 TV를 보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의사들은 온갖 원인규명 끝에 응고된 핏덩어리가 대동맥을 막아 일어난 폐색전증으로 진단한다. 그리고 환자 가족을 불러 고개를 내젓는다. 하지만 부검 결과 사망 원인은 엉뚱하게도 대동맥류 파열에 따른 출혈 과다. 또 뒤늦게야 졸리가 옛날에 찍은 엑스레이 사진을 정밀판독한 결과 이미 대동맥류 기미가 나타나 있다. 미리 치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셈. 하지만 환자가 쓰러진 뒤 찍은 엑스레이 사진엔 사망에 이를 정도로 출혈이 많았는데도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1999년부터 암 관련 문제로 피해구제를 신청한 150여건의 사례 중 의사의 오진이 70%를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최근의 소비자 보호원 발표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의사와 의학에 대한 믿음이 싹 사라질 정도이다.
대동맥류의 기미를 잡아냈으면서도 흉곽에 가득 찰 정도로 쏟아진 출혈이 나타나지 않는 엑스레이 사진. 툭하면 ‘사진을 한번 찍어보자’고 하면서도 사진을 제대로 판독하지 못하는 의사. 숨진 뒤에도 그 원인을 몰라 엉뚱한데 화풀이하는 의사들.
미국 보스턴의 외과의사인 저자가 실제 경험을 털어놓은 이 책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은 불완전한 현대의학과 의사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뒤, 그 한계와 불완전성을 인정해야만 의사와 환자 사이에 새로운 신뢰가 구축된다고 말한다.
이 책은 우리가 날카로운 메스를 든 외과의사를 보면서 떠올리는 냉철함과 완벽함은 저리간 채 오진, 실수, 허둥거림, 자만심 등으로 가득차 있다.
환자를 수술대에 올려놓고 허둥대는 외과의사의 모습은 독자가 더 당황할 정도. 전공의 수련과정이라지만 주사를 이리저리 찌르다 끝내 혈관을 찾지 못해 바늘자국으로 시퍼렇게 멍만 남긴 채 다른 선배의사에게 넘긴다. 총상을 입은 환자의 배를 가르고 이리저리 헤집어도 나타나지 않았던 총알이 봉합한 뒤 엑스레이 사진에 엉뚱한 데 있는 것으로 나타나 황당했다는 고백에 이르면 허탈하기까지 하다. 교통사고로 들어온 여자환자가 호흡곤란으로 산소농도가 떨어지자 입을 통해서만 성인용 관을 집어넣으려고 매달리는 의사. 결국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울대 밑을 절개, 기관절제술을 시도했으나 엉뚱한 데만 손상시키다가 환자의 목에 다시 유아용 관을 집어넣는 방법으로 산소 공급에 겨우 성공하는 의사들. 의사는 결국 환자 가족에게 산소공급 부족으로 뇌가 일부 손상될 가능성이 있다고 털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의사에게 어떻게 나의 생명을 맡길 수 있을까 라는 불안을 지울 수 없다. 그렇다고 아플 때 병원에 가지 않을 장사는 없다. 불완전한 의사의 손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는 의학을 실제보다 더 완벽하며, 동시에 실제보다 덜 특별한 것으로 본다”는 말로 대답한다. 과학으로서의 의학과 인간의 불완전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올 수 있는 환경에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 있다. 저자가 졸리가 숨진 뒤 그 아내에게 “우리가 처방한 약이 사망 원인이 됐을 수 있다”고 말하고도 무사할 수 있는 환경(우리나라에서는 의사가 처방을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물론 환자 가족이 가만히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을 말한다.
저자의 적나라한 고백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허상을 여지없이 걷어낸다. 그 허상이 사라진 뒤에야 ‘참된 신뢰’도 자랄 수 있다는데 동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