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여성혐오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나조차도, 이것은 여성혐오가 맞다고 생각한다. 아! 이제 여성혐오가 이 세상에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그것이 어떻게 확장하고 온라인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내가 여성혐오라고 명백하게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안산 선수의 숏컷을 두고, 온라인에서 페미 논쟁이 오간 것이다.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나는 저번에 GS사태 또한 그랬다. 가령, 그 디자이너가 그런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요즘처럼 어려운 시대에 그리고 애 까지 딸린 여자를 직장에서 나가도록 하는 것은 또 무어란 말인가! 정말 어의가 없을 지경이다.
물론, 나는 여성들이 여성혐오 범주에 있지 않은 것들을 여섬혐오의 범주에 넣어버려서, 남자들을 정신적으로 학대하는 일 또한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 또한, 그와 같은 일들은 아주 존재하지 않았거나 최근에 아주 잠깐 있었을 뿐, 나는 그것이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해서 남성들을 죽이는 단계까지 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남성들이 여성을 학대하는 것은 분명히 있어왔으며, 그로인해 수많은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나 또한 이해한다. 이준석이 페미들과 싸워서 이기는 것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긴 하지만, 그 소리가 얼마나 개소리인지 그리고 얼마나 편협하고 논리의 권위를 빌려서 그 어마어마한 혐오가 여성들에게 가해질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과거의 일을 바탕으로 현실을 조금 더 낫게 바꾸는데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성에 대한 인권 신장은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에서의 일이 그렇듯, 점진적으로 좋았던 것이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갑작스레 나락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이번에 읽은 책 <판도라의 딸들, 여성혐오의 역사>를 읽은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판도라의 딸들 여성혐오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상 가장 맹렬한 여성 혐오자라고들 한다. 그는 여성을 과학적인 관점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때로는 자연 세계를 정확히 관찰했고 다양한 생물종을 기술한 내용이 찰스 다윈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도 했지만, 여성에 관해서는 비뚤어진 견해를 가졌다. 여성의 열등함을 나타내는 징후로 머리가 벗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이를 여성이 더 아이 같은 본성을 지닌 증거라고 보았다. 또한, 여성이 남성보다 치아 수가 적다고 주장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이따금 한 번씩 아내가 입을 열게 허용했다면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 pp50~51
그랬다. 이것은 망각의 역사가 만들어낸 거대한 구멍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구멍은 시간이 지나면서 끊임없이 커지고 작아지기를 반복했지만 그것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끊임없이 당대의 사람들을 괴롭혔고 자살하게 만들었으며 끊임없이 자유를 스스로 억압하게 만들었다. 바로 여성혐오의 문제다.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이야기의 시작이다. 아! 물론 그 이전부터 없었다고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의 언변이 여성의 문제에서 만큼은 독이 됐던게 사실인 것 같다. 그리고 이전의 여성혐오는 어떻게 보면 투박하고, 또한 꺼질수 있는 불꽃이거나 번개와 같이 단발성이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시기부터는 논리정연하고, 땅속의 마그마처럼 언제나 지속가능하게 여성을 헤할 수 있는 논리와 관념의 형태가 됐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솔직히 책을 읽는 내내 고개를 위아래가 아닌 가로와 세로로 젖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는 작은 불편함이었지, 저자가 이야기 하려는 바를 부정하려는 고개 저음은 아니었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었고, 무엇보다 이 책은 여성 혐오가 조직적이기보다는 어떻게 지속가능하게 존재해왔는지를 통해서, 현재에 이것이 어떻게 문제가 어떻게 심화되고, 어떻게 해결의 방향으로 고민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