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백인이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원으로 생활하며 내 땅, 네 땅 가르지 않고도 땅 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아는 민족이었다. 백인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이주해 오기 시작하면서 원래 땅 주인이었던 원주민들은 근거지를 빼앗기고 쫓겨났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는 소유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백인들은 땅을 빼앗으면서도 피를 흘리지도, 대가를 지불하지도 않았다. 백인들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테라 눌리우스, 즉 주인 없는 땅이라고 불렀다. 1991년에 이르러 원주민 화해위원회가 설립되어 원주민의 삶의 터전을 인정받았으며, 1992년 대법원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주인이 없었다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판결했지만 원주민이 땅을 되찾지는 못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이주해 온 백인들의 만행은 원주민의 근거지를 빼앗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원주민을 오스트레일리아 사회로 동화시키기 위해서라며 강제적으로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빼앗아 격리시켰다. 원주민들은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라고 부른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애버리진’은 하층민을 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교육수준은 낮고 실업률과 범죄율은 높으며 평균수명은 짧다.
테라 눌리우스라는 좀 웃기는 개념이 있어요. 영국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에 건너와서 경작지가 많지 않은 걸 보고 만든 개념이에요. 애버리진들이 감자밭에서 반나절을 지키고 서 있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간주했지요. 그런데 애버리진은 자연을 속속들이 알았어요. 어디 가면 먹을 게 나는지 알고 제철에 찾아가 풍요롭게 먹고 살았죠. 그런데 한 자리에 정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영국인들이 이곳을 임자 없는 땅이라고 간주한 겁니다. 이게 테라 눌리우스예요. 그리고 텔라 눌리우스 원칙에 따라, 영국인들은 애버리진의 입장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자기네 마음대로 새로 들어온 정착민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나눠줬어요. p.139-140
요 네스뵈의 『박쥐(비채, 2014)』는 헤리 홀레가 시드니에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헤리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시드니까지 온 이유는 ‘워킹 비자로 오스트레일리아에 왔던 노르웨이인의 살인 사건 수사를 지원(p.20)’하기 위해서다. 시드니 범죄수사국은 노르웨이인 ‘잉게르 홀테르’ 살인사건을 연쇄살인인지 독립된 사건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부분의 살인사건이 피해자와 살인범이 아는 사이였다는 통계에 따라 홀테르가 만났던 남자를 중심으로 탐문 수사해 나간다. 그렇게 해서 홀테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마약 파는 남자와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동성애자가 차례로 용의자로 지목되지만 잉게르 홀테르를 살해한 진범은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진다. 범인이 헤리에게 털어놓은 범죄이유는 경악을 금치 못하게 만든다.
당신들은 이 땅에 처음 와서 우리가 땅에 씨를 뿌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를 재산권 없는 유목민으로 취급했어. 우리가 시퍼렇게 두 눈을 뜨고 보는 앞에서 우리 땅을 빼앗고 유린하고 난도질했어. (…) 이제는 당신들의 아이 없는 여자들이 나의 테라 눌리우스야, 헤리. 아무도 씨를 뿌리지 않았으니 누구의 소유도 아닌 셈이지. p.408
『박쥐』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생한 연쇄살인사건이 뼈대다. 뼈대를 지탱하는 밑바닥에는 백인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으로 이주해오면서 애버리진이 겪은 아픈 역사가 깔려있다. 요 네스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주인인 애버리진의 비극적인 역사를 소설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태어나자마자 정부에 의해 강제로 부모와 헤어져서 부모 얼굴도 모른 채 시설에서 자란 애버리진을 헤리 홀레 파트너로 등장시켰으며 위험과 불평등으로 점철된 애버리진의 삶을 보여준다. 현재진행형인 애버리진의 비극적 역사를 알기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분노는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역사가 지은 잘못을 살인으로 되돌려주는 방식까지 이해할 수 없다.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갖다 붙여서 살인을 저지른 사이코패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그들을 아꼈던 사람들이 견뎌야 할 슬픔을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남겨진 자들이 감당할 슬픔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박쥐』는 형사 헤리 홀레 시리즈를 시작하는 첫 번째 이야기다. 만약 헤리를 이 소설로 처음 만났다면 다른 시리즈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헤리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요 네스뵈의 플롯 구성력은 박수 쳐 주고 싶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기에 그렇다. 오랜만에 경악했고 분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