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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도서]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저

내용 평점 5점

구성 평점 5점

 

근 눈,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물에 잠긴 무덤들, 봉분 아래 드러난 뼈들.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그 꿈은 활자로 인쇄된 종이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서를 써놓고 삶을 마감하려는 경하는 자신을 옭아맸던 꿈의 실체가 다름아닌 제주 4·3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록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 한강에게 있어 제주 4·3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역사 속에 스러져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기록되고 또 어떻게 기억될까.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선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p.44~45)


 

소설 속에는 온통 눈(雪)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성근 눈, 진눈깨비, 눈송이, 함박눈, 눈보라, 폭설. 그 눈의 형태도 다양하다. 그리고 눈은 칠십 여 년 전 그날에도, 가출한 인선을 기다리는 엄마의 꿈 속에도, 인선이 입원한 병원 창 밖에도, 경하의 집 유리창 너머로도, 새를 구하러 간 제주도에도 내린다. 순백의 눈은 아름답고 포근하게 세상 모든 것을 감싼다. 작가의 말처럼 눈은 차갑고 가벼우며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부드럽다(p.186). 하지만 눈은 지상에서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달리 대기 중에서 만들어질 때 기상 조건에 따라 그 결정 모양과 크기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모양의 눈 결정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눈 결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칠십 여 년 전, 두 소녀가 죽은 가족을 찾기 위해 걷어내야 했던 그 눈은 어떤 결정의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얼굴을 덮고 있던 하얀 눈과 무섭도록 선명한 고통.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이미지가 어린 두 소녀에게 각인된 채 삶 전체를 관통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감당했을 삶의 무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p.288)


 

책을 읽다 보면 스토리를 따라가며 내용을 곱씹어도 누가 살아 있는 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 소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스라히 넘나든다. 그 밤의 일들 또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 오랜 기간 동안 수면 장애를 겪고 폭염과 기아, 추위에 노출되었던 경하가 느끼는 섬망 같은 증상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상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고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여부를 가려 스토리 전후 관계를 명확하게 따지는 것은 그 순간부터 의미가 없어진다. 그들은 칠십 여 년 전 제주도 그곳을 기점으로 하여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젖먹이 아기까지도 빨갱이로 몰려 절멸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그 날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 살아있지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한 숨 한 숨 숨을 고르며 책장을 넘기지만 감각을 깨우는 선명한 고통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와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p.197)


 

물은 그 형태를 바꾸어 끊임없이 지구 표면을 순환한다. 그렇다면 소설 속 작가의 말처럼 칠십 여 년 전 그날의 눈도 형태를 바꾸어 지금 우리 곁을 순환하고 있지 않을까. 물이 순환하듯 사람들도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며 그 관계 속에 사람들 마음 또한 이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삶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가 되고. 그렇다고 본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악몽을 견디기 위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녹슨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p.213)의 삶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정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삶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의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 잘못된 이념과 무고한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권력은 그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그날의 역사를 바로잡아 두 번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책무 또한 우리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 311)


 

소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채 덤덤한 말투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온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는 고통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책을 읽는 독자가 느껴야 할 고통이라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적 진실들과 대면하고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의 시간 속에 보냈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206), 명치에 걸려 그토록 이글이글 타던 불덩어리가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p.87) 그 고통의 근원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고통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자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로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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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타블로거 흙속에저바람속에

    제주 4.3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읽어보진 못했는데, 책표지에 그려진 '눈' 결정에 그러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군요! 위풍당당님의 리뷰를 읽는 내내 간접적으로나마 소설에서 말하는 고통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저마다 다른 눈의 결정과 더불어 '물'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네요. 불현듯 소설 속에 인물들이 흘렸을 것으로 짐작되는, 눈과 물을 합친 말인 '눈물'이 마지막에 작가님과 위풍당당님이 말씀하신 지극한 사랑의 결정체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스쳤습니다. 올해 마지막 날에 위풍당당님의 가슴시린 리뷰가 참 와닿았습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연말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에는 더 왕성한 책과 일상 이야기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21.12.31 18:56 댓글쓰기
    • 위풍당당

      이웃님들의 좋은 글만 읽고 글을 올리지 못해서 마음이 너무 그랬습니다. 죄송한 마음에 추천만 누르고 댓글도 못 달고 ㅠㅜ 이 책 너무 읽고 싶었던 한강 작가님의 책이라 올해가 다 가기 전에 꼭 읽고 글을 올리자고 다짐했구요. 이렇게 2021년의 마지막 날에 글을 올리게 되어 다행이기도 하고 기억에 더 남을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이 300여 페이지밖에 안 되는데 아, 어렵기도 하고 너무 마음이 아파서 책이 쉽게 넘어가지 않더라구요. 내년에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다고 약속을 드릴 순 없지만ㅎㅎ 2021년은 흙속에저바람속에님의 글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한 해였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21.12.31 19:18
  • 스타블로거 삶의미소

    <소년이 온다>에서도 너무나 덤덤한 글을 접하며 오히려 그 감정들이 깊이가 더해가 고통이 너무 고스란히 느껴져서 읽고 나서 한동안 참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서 정말 이렇게도 역사의 고통을 전달할 수 있는 한강의 능력에 감탄했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런 고통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나보네요. 읽어봐야지 하면서 사실 <소년이 온다>처럼 감정의 동요가 너무 심할 것 같아 뒤로 미뤄두고 있는데 이 책도 분명 명작일 거란 생각이 드네요 ^^
    위풍당당님의 2021년 마지막 리뷰를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로 접할 수 있어서 더욱 의미있게 생각되네요. 오늘이 지나고 짠 ~ 내일 새해가 밝아오면 새로운 기분으로 위풍당당하게 2022년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21.12.31 19:12 댓글쓰기
    • 위풍당당

      아, 맞아요. 글이 그리 길지도 않고 감정을 확 드러내지도 않는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프더라구요. 그래서 좀 우울했던 것 같기도 하구요. 한강 작가님의 이야기는 진지하면서도 덤덤한 그 무엇이 사람 마음을 훅 치고 들어오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제주 방언이 있어서 좀 힘들기도 했구요. 문장 하나하나가 그냥 다 명언이고 예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문제는 제 문학적 소양과 감수성이 떨어져 리뷰로 그 감동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ㅠㅜ 온전히 다 이해를 하지 못해서 내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ㅎㅎ 비록 머리는 아프지만 올해가 다 가기 전에 한강 작가님의 책 읽고 리뷰 남겨서 너무 행복합니다!!!!!

      2021.12.3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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