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근 눈,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물에 잠긴 무덤들, 봉분 아래 드러난 뼈들. 온통 무채색으로 가득한 그 꿈은 활자로 인쇄된 종이라는 공간을 뛰어넘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유서를 써놓고 삶을 마감하려는 경하는 자신을 옭아맸던 꿈의 실체가 다름아닌 제주 4·3 사건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객관적 기록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 한강에게 있어 제주 4·3 사건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역사 속에 스러져간 무수한 사람들의 삶은 과연 어떻게 기록되고 또 어떻게 기억될까.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선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p.44~45)
소설 속에는 온통 눈(雪)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성근 눈, 진눈깨비, 눈송이, 함박눈, 눈보라, 폭설. 그 눈의 형태도 다양하다. 그리고 눈은 칠십 여 년 전 그날에도, 가출한 인선을 기다리는 엄마의 꿈 속에도, 인선이 입원한 병원 창 밖에도, 경하의 집 유리창 너머로도, 새를 구하러 간 제주도에도 내린다. 순백의 눈은 아름답고 포근하게 세상 모든 것을 감싼다. 작가의 말처럼 눈은 차갑고 가벼우며 녹아 자신을 잃는 순간까지도 부드럽다(p.186). 하지만 눈은 지상에서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달리 대기 중에서 만들어질 때 기상 조건에 따라 그 결정 모양과 크기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모양의 눈 결정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날카로운 바늘 모양의 눈 결정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칠십 여 년 전, 두 소녀가 죽은 가족을 찾기 위해 걷어내야 했던 그 눈은 어떤 결정의 모양을 하고 있었을까. 얼굴을 덮고 있던 하얀 눈과 무섭도록 선명한 고통.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이미지가 어린 두 소녀에게 각인된 채 삶 전체를 관통했다고 생각하니 그들이 감당했을 삶의 무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허깨비.
살아서 이미 유령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p.288)
책을 읽다 보면 스토리를 따라가며 내용을 곱씹어도 누가 살아 있는 자이고 누가 죽은 자인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부터 소설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스라히 넘나든다. 그 밤의 일들 또한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다. 오랜 기간 동안 수면 장애를 겪고 폭염과 기아, 추위에 노출되었던 경하가 느끼는 섬망 같은 증상인지 아니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상인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를 나누고 그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여부를 가려 스토리 전후 관계를 명확하게 따지는 것은 그 순간부터 의미가 없어진다. 그들은 칠십 여 년 전 제주도 그곳을 기점으로 하여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젖먹이 아기까지도 빨갱이로 몰려 절멸의 대상이 되어야만 했던 그 날을 떠올려 본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죽은 사람처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두 세계를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 살아있지만 유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한 숨 한 숨 숨을 고르며 책장을 넘기지만 감각을 깨우는 선명한 고통이 글자 하나하나에서 배어나와 온 몸으로 전해져 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야.
정말 헤어진 건 아니야, 아직은. (p.197)
물은 그 형태를 바꾸어 끊임없이 지구 표면을 순환한다. 그렇다면 소설 속 작가의 말처럼 칠십 여 년 전 그날의 눈도 형태를 바꾸어 지금 우리 곁을 순환하고 있지 않을까. 물이 순환하듯 사람들도 끊임없이 관계를 형성하며 그 관계 속에 사람들 마음 또한 이어진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삶 하나하나가 모여 역사가 되고. 그렇다고 본다면 결국 우리는 모두 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악몽을 견디기 위해 외딴집에서 솜요 아래 녹슨 실톱을 깔고 보낸 육십 년(p.213)의 삶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정신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삶의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통의 역사와 대면해야 한다. 잘못된 이념과 무고한 생명의 희생으로 얻은 권력은 그 어떤 것이라 해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못된 그날의 역사를 바로잡아 두 번 다시는 그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책무 또한 우리가 지고 있기 때문이다.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 311)
소설 속에서 작가는 자신의 감정을 배제한 채 덤덤한 말투로 그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책을 읽는 내내 온 감각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지는 고통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책을 읽는 독자가 느껴야 할 고통이라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적 진실들과 대면하고 또 얼마나 많은 날들을 고통의 시간 속에 보냈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화살촉처럼 오목가슴에 박혀 있는 것(206), 명치에 걸려 그토록 이글이글 타던 불덩어리가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p.87) 그 고통의 근원이 인간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고 그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이야기를 고통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자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p.329)로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