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르타 뮐러 장편 소설 『숨그네』 (문학동네, 2021)를 읽고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처절한 상황을 이토록 아름답게 쓸 수 있을까? 어느 문장이나 단락을 떼어 놓아도 그대로 ‘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세상의 끝 극한의 절망이다. 배고픈 천사,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음식으로 환원되는 생각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혼돈 속에서 할머니가 헤어질 때 했던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을 희망 삼아 버텨 낸 수용소의 5년,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 속에서도 시처럼 아름답고 소름 끼치도록 구체적인 묘사들에 가슴을 졸이며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절망과 적응, 삶에의 의지를 ‘빛나는 은유’로 빚어 쓴 시 같은 소설이다.
루마니아에 사는 독일인이라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수용소로 끌려가는 사람들. 17세 ‘레오’를 통해 사선을 넘나드는 삶을 기록한 책이다. 이야기는 탄탄한 플롯에 의해 수용소로 가지 전, 수용소, 집으로 돌아와서의 시간순으로 배치된 듯 보이지만, 구조 자체가 단순하지는 않다. 회상과 기억을 거듭하면서 고무줄처럼 과거로 미래로 자유자재로 날아다닌다.
옮긴이가 소개하는 책의 줄거리를 적어 본다.
“『숨그네』는 레오가 돼지가죽으로 만든 ‘축음기 상자 트렁크’에 짐을 싸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리나무 공원에서 ‘들짐승 같은’ 밀회를 즐기는 열일곱 살의 동성애자 레오는 ‘돌에도 눈이 달린, 골무 같은 소도시’를 벗어나 ‘나를 모르는 곳’으로만 가고 싶다. 이곳만 아니라면 동성애자라는 ‘목덜미에 두른 불편한 침묵’을 벗어던지고 자유로이 쉼 쉴 수 있을 것만 같다. 레오는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할머니의 작별 인사를 배웅 삼아 가축 운반용 열차에 몸을 싣고 우크라이나로 떠난다. 강제수용소에서의 오 년 동안 레오와 수용소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낯선 타인’으로 만들어간 건 혹독한 추위도, 강제노동도, 수용소 사람들이 배급받는 옷과 신발을 팔아 사욕을 채우는 파렴치한 감독도 아닌 배고픔이었다. 배고픔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었다.
중략
배고픔은 형태와 단계를 바꾸어 나타난다. 배를 채우면 눈의 허기가 찾아오고, 눈의 허기를 채우면 또 다른 허기가 솟아나 아귀 지옥의 연대기를 만들어간다. 배고픔의 끝, 욕망의 끝에서 ‘한 방울 넘치는 행복’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배고픈 천사와 숨그네는 멈추지 않는다”
「짐 싸기에 대하여」에서 (17P)
“나무복도에서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돌아올 거야.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말을 대수롭지 않게 수용소로 가져갔다. 그 말이 나와 동행하리라는 것을 몰랐다. 그러나 그런 말은 자생력이 있다. 그 말은 내 안에서 내가 가져간 책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다.”라고 적혀 있다. ‘너는 돌아올 거야’라는 말은 마치 주문처럼, 종교처럼 레오에게 들러붙었다. 그래서 “어떤 말은 사람을 살리기도 한다.”라고 쓰기도 했다.
「명아주」에서 (30P)
“점호 시간에는 부동자세로 서서 나를 잊는 연습을 했다. 들숨과 날숨의 간격이 크지 않아야 했다. 고개를 들지 않고 눈만 치켜떴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내 뼈를 걸어둘 만한 구름 자락을 찾았다. 나를 잊고 하늘의 옷걸이를 찾으면 그것이 나를 지탱해 주었다”
“비가 눈을 찌르고 옷이 피부에 들러붙는 날도 잦았다. 추위가 내장을 찌르는 날도 잦았다. 그런 날은 하늘이 내 흰자위를 뒤집었고 점호는 그걸 다시 뒤집었다. 걸릴 곳이 없는 뼈들은 오로지 나한테만 걸렸다”라고 적고 있다. 점호... 뼈들을 걸어 둘 구름조차 없는 잔인함이라니.
「명아주」에서 (35P)
“나는 혀를 안으로 당기고 공기를 씹었다. 침과 저녁연기를 삼키며 구운 소시지를 생각했다.”, “칫솔을 입에 집어넣기 전에 두 번 먹었다. 주린 눈으로 노란 불을 먹고, 주린 입천장으로 연기를 마셨다.”, “가마의 우르르 소리와 함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쏟아졌다. 저녁 풍경은 배고픔의 파노라마였다. 땅거미가 내리고, 나는 막사의 노란 불빛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런 순간을 경험하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세상 모든 것이 배고픔을 달래기 위한 음식으로 환원되고 있는 순간이다. 이런 문장들의 연속이어서 나는 심장이 점점 작아져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긴장하며 한 줄 한 줄 읽어 나갔다.
「손수건과 쥐」에서 (88P)
“수용소에서는 그런 손수건을 쓸 일이 없었다. 그 수년 동안 물물교환 장터에서 먹을 것과 바꿀 수도 있었다. 그 손수건이면 설탕이나 소금. 어쩌면 좁쌀도 얻을 수 있었다. 배고픔에 눈이 멀어 그런 유혹도 느꼈다. 내가 참고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손수건이 내 운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운명을 포기하면 지는 것이었다.”
이 문장은 이 책의 주제를 담고 있는 문장 같다. 아무리 혹독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나로 치환된 손수건이 아닐까 생각했다. 구걸을 나갔다가 어떤 아주머니가 수프와 함께 준 흰 아마포 손수건은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보관했다가 집에 돌아올 때 가져온다.
「누가 땅을 바꿔놓았나」에서 (213P)
“뼈와 가죽만 남으면 감정은 담대해진다. 나는 차라리 겁쟁이이고 싶다. 차이는 근소하지만 나는 내 힘을 울지 않기 위해 쓴다. 어쩌다가 감정이 흔들릴 때는 상처를 향수 鄕愁 잃은 메마른 이야기로 바꾼다.”라고 말하고 있다.
배고픔과 향수를 잊기 위해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며 ‘사람은 울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른눈으로 견뎌왔다고 적고 있다.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에서 (275P)
“수용소를 나온 지 육십 년이 지나도 음식을 먹을 때면 나는 흥분된다. 나는 온몸의 구멍을 모두 열어젖히고 먹는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것은 불편하다. 먹을 때 나는 독재자다. 입의 행복을 모르는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예의를 차리며 먹는다. 그러나 먹을 때 내 머릿속에는 여기 앉아 있는 우리처럼 누구에게나 언젠가는 찾아올 한 방울 넘치는 행복이 스쳐 간다. 머릿속의 새 둥지, 숨결 속의 그네, 가슴속의 펌프, 배 속의 대기실을 내주어야 할 그 순간. 먹는 게 너무 좋아서 죽고 싶지 않다. 죽으면 먹을 수 없으니까.”
이토록 가련한 '레오'는 수용소에서 돌아온 후로도 평범한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오지는 못한다.
「수용소의 행복에 대하여」에서 (276P)
“고향으로 돌아온 후 매일같이 다른 허기가 생겨나 채워지기를 기다리지만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나는 누구에게도 곁을 내어줄 수 없다. 나는 배고픔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자부심이 아니라 겸허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급기야는 ‘고향이 수용소의 행복을 누그러뜨리지 못했음을 안다’라고 고백한다. 극한의 고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삶 전체를 지배하고야 만다.
「보물에 대하여」에서 (326P)
“나는 내 해골 전체가 커다란 부지라고, 수용소 부지라고 말해야 한다. 침묵으로도 말로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 침묵할 때도 말할 때도 과장하게 된다. 그러나 어느 쪽에도 나 거기 있었다는 없다. 적절한 한도도 없다. 그러나 보물은 있다.”, “내 귀향은 감사함이 끊이지 않는 절름거리는 행복이며, 사소한 일에도 뱅글뱅글 돌아가는 살아남음의 팽이다. 그것은 내가 견디지도 놓아주지도 못하는 나의 보물들처럼 나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 나는 내 보물들을 육십 년이 넘도록 사용하고 있다. 그것들은 허름하고, 집요하고, 은밀하고, 혐오스럽고, 잘 잊히고, 쉽게 용서하지 않으며, 닳아도 새것이다.”
수용소에 있었다는 사실이 보물이고, 닳아도 새것이라고 말하는 레오를 어쩌면 좋을까...
집에 돌아와서도 수용소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최근 “어떤 사건은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라는 시를 읽었다. 그리워했던 집이었는데, 두려웠던 수용소보다 나을 것도 없었다는 레오. 마음의 무덤덤하고 피폐함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갈구했던 삶의 일상에서 꿈에서까지 자신을 지배하는 수용소에서의 극한의 고통을 이기기 어렵고 그것을 아예, 극복할 의지도 없이 그림자처럼 지배당하며 그 후 60년을 살아간다고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직장을 구해 일도 해보고 결혼도 해보지만 결국은 가족들과 섞이지 못하고 홀로 떠난다.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또한, 인간은 어디까지 그 잔인함을 당하며 견뎌낼 수 있을까? 함께 갔던 사람들의 3/5 이상이 죽어갔던 상황에서도 그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있었고, 같이 끌려온 무리 중에서도 물건을 빼돌려 사욕을 채우느라 추위에 얼어 죽는 사람들을 외면한 무리도 있었다는 것이 환멸스러웠다.
소설이라지만 이런 것을 실제로 겪은 사람의 이야기를 토대로 소설이 쓰였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시인 오스카 파스티오르의 증언을 기록하면서 이야기의 씨앗이 시작되었다. 헤르타 밀러는 독재체제의 루마니아에서 독일로 망명하면서 신문과 잡지에서 잘라내 보관했던 ‘낱말 상자’를 가져갔다고 한다. 낱말들을 조합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취미였다고 하는데 그 방법은 문창과 수업에서 스토리 창작 연습으로 배운 적이 있다.
과연 언어의 마술사답게 단어들을 조합해 새로운 단어들을 만들어 냈다. 숨그네, 배고픈 천사, 심장삽, 감자인간, 양철키스, 볼빵 등이 그것이다. 헤르타 뮐러는 베를린에서 전후 전체주의의 공포를 생생히 묘사한 소설들을 썼다. 2009년, “박탈당한 삶의 풍경을 응축된 시와 진솔한 산문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받으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그이 마지막 약력에 큰 박수를 보낸다.
나에게 이 책의 백미는 은유의 아름다움을, 슬프고도 빛나는 묘사를 알게 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가끔 그만 살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남편도 말썽꾸러기 아이도 사랑해야 할 존재들로 바뀌었다. 쌀 한 톨, 물 한 모금, 넘쳐나는 자유에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