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의 고백이자 심리 스릴러적인 특성이 있는 이 책의 제목인 ‘푸시(Push)’는 책에서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아이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행위, 즉, 출산을 의미하는 말이다. 또 다른 의미는 이 작품 내에서 가장 큰 비극으로 그려지는 아이의 죽음을 야기한 행위, 유모차를 밀어버린 그 동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기에 세 번째를 더할 수도 있다. 보통 서로를 안고 가까이 끌어당겨야 한다고 믿는 모녀 사이의 감정적 밀어냄을 상징하는 행위. - 옮긴이(박현주)의 말에서
1인칭 시점의 설명체로 주인공은 ‘작가 지망생’이다. 제목의 푸시가 뜻하는 의미가 그러하듯 이 책은 너무도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내용이어서 400P에 달하는 책을 덮는 순간까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모성이 어떤 아이한테는 발현되지 않기도 한다. 그래서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이 따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 블라이스는 첫째 딸 바이올렛에게는 도저히 모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 몸에서 나온 아이라는 인정이 들지 않는다. 한편, 둘째인 샘에게는 샘솟는 모성의 충만을 느낀다.
엄마로부터 유대감과 사랑, 따스한 모성을 느껴보지 못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엄마가 된다. 자기 엄마 같은 사람은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며 남편이 원하는 좋은 엄마가 되기로 한다. ‘정상적’인 가정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를 꿈꾼다. 남편은 따뜻한 부모 아래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이다. 임신과 출산, 육아와 돌봄의 과정이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된다. 생각지 못했던 삶에서 혼란을 경험하며 극도의 불안과 책임감으로 부담이 더해진다.
잠을 자지 못하는 아이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무너져간다. 기질적으로 예민하고 성정이 까칠한 아이를 ‘너의 마음에 문제가 있어, 조금 더 사랑해 줘’라는 식으로만 말하는 남편을 대할 때마다 지쳐간다. 아이가 엄마를 밀어내고 엄마에게 적대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모성이 생겨나지 않는다. 남편은 예민한 딸을 키워내는 아내를 위로하기보다는 좀 더 노력하기를 바라는 말들로 안타깝게 한다.
주인공 블라이스와 어머니 세실리아, 외할머니 에타, 블라이스의 딸 바이올렛까지 모녀 4대가 등장한다. 이야기는 외할머니와 엄마의 관계, 엄마와 나의 관계, 나와 딸인 바이올렛까지 세 모녀의 관계가 섞여가며 펼쳐진다. 할머니는 자기 성질을 못 이기는 여자였고, 물리적인 폭력도 할머니에서 엄마로 유전적으로 내려오며 자기 딸을 향한 불안감, 정신적인 극한의 한계를 느낀다. 책 전체가 주인공만의 시점이라는 의심도 하지만 극도로 세밀하게 진술하고 있어서 의심을 멈추게 한다. 남편은 방관과 책임을 떠넘기는 등 이기적인 태도를 보인다.
어머니와의 유대와 애착이 없는 것을 넘어, 증오를 넘어, 아예, 어머니가 없는 것처럼 살아온 블라이스는 자기의 딸 바이올렛과도 애착과 모성을 느낄 수 없다. 바이올렛은 엄마를 계속 밀어내고 아빠와만 유대관계를 형성해 간다. 어린이집에 맡겨진 바이올렛에게 극심한 폭력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친구가 아플 때까지 팔을 비틀거나 꼬집기 등 상담을 받으러 가지만 정작 아이는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며 아빠인 폭스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다.
어느 날, 어린이집에 바이올렛을 데리러 간 블라이스는 놀이터 미끄럼틀 위에서 달려오는 친구의 발을 걸어 아래로 떨어져 죽게 만드는 사고를 목격한다. 바이올렛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엄마한테 간식 먹으러 가자고 말한다. 남편은 엄마와 바이올렛의 관계가 소원한 것도 무조건 아내의 탓으로만 돌리고 전폭적으로 딸의 편을 든다. 바이올렛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놀이공원에서 산, 사자 커플 인형 중 엄마 사자 인형을 차 밖으로 던져 버린다.
다른 아이를 키워 보고 싶은 열망에 둘째를 낳는다. 둘째는 블라이스가 원하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이다. 둘째 아이와의 유대감과 모성은 모성 본연보다 더 크고 깊었다. 바이올렛은 시시때때로 동생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징조를 보인다. 마침내, 동생이 타고 있는 유모차를 찻길로 밀어 사망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함께 있던 블라이스의 탓으로 돌린다. 모든 사람이 바이올렛이 유모차를 밀어서 그랬다는 말을 믿지 않고 오히려 블라이스를 요양원에 보낸다. 요양원에서 돌아왔을 때, 바이올렛은 엄마가 다시 집을 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샘의 죽음 이후 안정을 찾지 못하는 블라이스를 두고 남편은 여비서와 아이를 갖게 되고 이를 안 블라이스와 헤어진다. 블라이스는 그 여자가 궁금해 접근하여 가까워진다. 바이올렛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빠 집을 좋아하고 아빠와 결혼한 여자를 엄마라고 부르며 평화롭게 지내는 듯 보인다. 그렇지만, 블라이스는 바이올렛의 위험성을 여자한테 알려 준다. 여자는 믿으려 하지 않지만, 결말에서 새 동생에게 일이 생겼다는 전화를 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부부의 사소하고 평범하고 다정했던 말과 행동들이 의미 없이 무너지고 흩어지며 마음으로부터 멀어진다. 수없이 딸이 이상하게 자라고 있는 부분을 말해도 진정으로 들어주지 않는 남편. 그 모든 것들을 아내의 잘못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런 생활의 반복으로 블라이스는 남편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게 된다. 알고 있는 불행하고 끔찍한 사건을 주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모두가 그를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며 세월은 흘러간다. 블라이스는 바이올렛을 향한 모성을 발휘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아이는 변하지 않고, 블라이스는 자신이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을 고쳐보려고도 한다.
책을 읽으면서도 혹시, 블라이스의 기억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블라이스가 너무 예민해서 딸을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나는 블라이스에 몰입되었기 때문에 바이올렛을 어쩌면 좋을지 너무 걱정되었다.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모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한 여성의 깊은 내면과, 어머니들의 삶과 굴레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진 책의 내용을 따라가며 긴장과 탐색의 시간이었다.
반면, 이야기의 초반에 블라이스가 임신과 출산, 육아를 몹시 어렵게 받아들이고 힘들어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애착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탓인지, 딸과의 관계에서도 애착 관계가 생성되지 않는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초기의 애착 형성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고, 애착 형성이 잘되지 않으면 아동기뿐 아니라 성인기의 여러 가지 정신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을 정립했다. 생애 초기에 어머니의 적절한 돌봄 행동에 의해 아이가 갖게 되는 안정적 애착이 자신과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내적인 작동모델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
위와 같은 이론 자체가 여성의 모성을 강요한다는 반박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블라이스는 글을 쓰느라 아이가 잠에서 깨서 울 때, "아이의 목소리가 높아져 광적으로 되어야 나는 노트북을 닫고" 아이한테 갔으며, 음악을 듣고 있느라 아이가 두 시간 가까이 울고 있는 것을 못 들을 적도 있었다는 부분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아이와 엄마의 애착 형성의 부족으로 인해 비뚤어지게 성장하고 끝까지 원만한 관계 형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측면으로 읽혔다.
블라이스와 엄마와의 관계에서나 엄마와 할머니와의 관계 또한 다정한 모성은 없었으며, 그로 인해 블라이스도 딸인 바이올렛에게 모성이 느껴지지 않는 안타까운 정서적 흐름이 일면 이해되기도 했다. 가족이면서도 아이는 무조건 엄마가 양육해야 한다는 강요를 넉넉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주인공의 자기 존재를 입증하고자 애쓰는 부분도 이해되었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엄마라는 역할과 글쓰기의 병행 등 어려움이 지속되는 환경에서 내가 낳은 아이를 길러내기가 너무 어렵고, 반사회적 성격장애가 의심되는 아이에게 공포를 느끼고, 자기의 딸을 의심해도 되는지, 아빠와 딸 사이에서 끼어들 수 없는 소외감 등 자신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린다.
책의 전편에 흐르는 서스펜스는 딸이 일으키는 행위로부터 펼쳐진다. 다른 어른들은 블라이스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상식적인 선에서만 사건을 보고 해결하려고 한다. 상실과 패배감 등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현실에서 참고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의 엄마들을 대변하기 위해 이토록 강렬한 필치와 극단적 전개로 쓸 수밖에 없었을 작가의 책임감, 양육자로서의 여성의 본질,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여성, 어머니라는 존재 양식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의미 있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