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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리뷰
햇빛에 등을 기대고 살다
민휴
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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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붙잡고 쓴 시집이라고 적다가 시집의 제목이 “빛그물”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빛과 그림자가 물 위에 짠 빛그물’ 말이다. 이 책은 빛과 어둠으로 직조한 시집이다. 햇살, 안개, 햇빛, 별, 어둠, 반짝임, 슬픔 등의 단어들이 번갈아 등장하기에 빛과 어둠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짜였다. 「빛그물」에서 뿌리가 엉켜 죽게 된 상황에서도 벚꽃 잎을 떨어뜨려 아름다운 빛그물을 만들고 싶은 것이 시인의 심정이다.
인간관계의 얽힘, 삶과 죽음의 얽힘에서 정해진 잣대, 고정관념이 아니라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 유연한 삶의 자세를 가진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로만 쓰지 않고 두 가지를 써서 엮은 옷감 같은 시다. (가령 이런 표현들:) “가기도 하고 말기도 한다”(「토끼도 없는데」), “열심히 듣는다고는 하지만 듣지 않는다”(「삼단어법으로」),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방 안에 코끼리」), “잊어버린 건지 기억하는 건지”(「입김」), “아랫집인지, 윗집인지, 옆집인지”(「반짝반짝 작은 별」) 등.
냄비, 접시, 수세미 등 나도 알 것 같은 새삼, 중요할 것 같지 않은 일상들이 작가의 말로 표현하게 되면 빛나는 시가 된다. 일상에서 발견한 것들을 시로 길어 올리며 시처럼 살았던 시인이다. 냄비에 우유 따르는 이야기 (「긴 손잡이 달린」), 시장에서 이불 산 이야기 (「이불 장수」), 냄비 뚜껑 굴러 떨어지는 소리 (「냄비는 왜?」), 울면서 식탁밑으로 기어드는 딸애 (「반짝반짝 작은 별」), 개미가 한강 다리 지나는 이야기 (「개미와 한강 다리」), V자 편대비행의 새들 (「각자도생의 길」) 등

일반인들이 잘 보지 못하는 것들까지 살펴서 볼 수 있는 세심한 관찰자가 최정례 시인이다. 「안개의 표현」, 「물고기 얼굴」, 멸치의 눈(「겨자소스의 색깔」), 도미의 마지막 표정(「여름을 지나는 열세 가지 새소리」), 버스 창에 담긴 내 얼굴(「우박」), 살 속에 숨겼던 더듬이 끝에 두 눈을 달고 (「소라 아니고 달팽이」), 존재의 무게가 거의 없는 것이 (「개미와 한강 다리」) 등. (아래 「입자들의 스타카토」의 전문을 인용한다.)
입자들의 스타카토
반짝임, 흐름, 슬픔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줄은 몰랐다
강물이 영원의 몸이라면
반짝임은 그 영원의 입자들
당신은 죽었는데 흐르고 있고
아직 삶이 있는 나는
반짝임을 바라보며 서 있다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없는 걸까
무심한 격랑과 무차별 속으로
강물이 흘러간다
반짝임과 흘러가는 것, 강물과 반짝임, 당신과 나, 의미 있음과 의미 없음. 강물 위로 비치는 햇빛과 흐르는 물줄기의 굴곡에 비친 반짝임. 실제 삶과 괴리된 풍경을 바라보고 선 허무가 느껴진다. 작가는 빛과 흐름을 통해 삶과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을 향한 마음이 보여서 슬프도록 빛나는 아름다움이 읽힌다. 이 책의 제목은 빛그물이지만, 내가 읽기로는 「입자들의 스타카토」가 이 책의 대표시라고 생각되었다.
「반짝반짝 작은 별」에서 평화로운 삶의 풍경을 꿈꾸지만, 부모를 따로따로 요양원에 맡기고 출근한 작가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전체적 시의 분위기는 삶의 고난을 빛에 기대어 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는 의지와 함께 삶에의 체념과 허무와 반짝임까지도 느껴진다.
서사와 맥락이 분명하지 않는 것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 이 책은 산문성이 강해서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있었다. 새, 코끼리, 달팽이, 소라, 토끼, 매미, 개, 소, 앵무, 개미 등 동물과 안개, 강물, 별, 햇빛, 모래, 나무, 첫눈 등 자연물에 대한 관심과 관찰로 그들의 일을 인간 삶과 연결해 시로 표현한 작가의 저력이 느껴진다.
끝으로, 작가의 허락 없이 이래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들을 이어 붙였더니 한 편의 시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목은 “슬플 것도 없고 지루할 것도 없고(「긴 손잡이 달린」에서)”쯤이면 어떨지.
반짝이는 것과 흘러가는 것이 한 몸이 되어 흐르는 줄은 몰랐다(「입자들의 스타카토」)
문득 생각해 보니 뭔가를 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잡고 있으려 했고 놓지 못하고 있었다.(「긴 손잡이 달린」)
손톱만 한 것을 주먹만 한 것으로 키우며 밤마다 걱정거리를 굴린다.(「소라 아니고 달팽이」)
천 개의 바늘이 찌르듯 온몸이 저려오면서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었다.(「방 안의 코끼리」)
기쁨이 지나갔다 슬픔이 지나갔다 발을 굴렀다(「공중제비」)
뭔가 억울한 듯해서 자다가 벌떡 일어나 앉은 적이 있다. 가만두지 않을 거야, 죽여버릴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쓰러져 잔다.(「매미」)
아, 그러지 말고 다른 세상과 접촉을 해봐(「고슴도치에게 시 읽어주기」)
더운 여름날이다. 창문을 통해 반짝반짝 작은 별이 바람 타고 들어온다.(「반짝반짝 작은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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