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기억한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한참 동안 책장에 꽂아뒀다가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정리하면서 발견한 책. 워낙 짐이 무거우니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지인에게 주거나 버리고 오는데, 안 보고 버리면 아까우니 읽고 두고 오자란 생각에 첫 장을 넘겼고, 다 읽고 난 뒤에 묵직한 감동에 예정에 없었으나 짐에 넣어 한국까지 가져온 책 <죽음의 수용서에서>다.
일고십 질문 1.
/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되는 인간이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다행히 독일은 지속적으로 그 사실들에 대해 사과하고, 잊지 않고 있지요. 그 중 가장 많은 회자 되는 부분은 바로 유대인 학살입니다.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들이 많이 전해지면서 더욱 많은 공분을 사게 되었지요.
그런 유대인들은 왜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만 있었을까요? 물론 많은 이들이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고, 반기를 드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아우슈비츠도 수만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어째서 수용적인 태도로 그런 부당한 대우를, 심지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상황을 묵묵히 감내했던 것일까요? 그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잘 지내는 것 혹은 삶을 내려놓는 것 밖에 없었던 것일까요?
ㄴ 글을 쓰기 전에 같이 책을 읽은 일고심 멤버들의 독후감을 다시 찾아 곱씹어 읽었다. 담배피는어린왕자의 독후감을 보며 마치 여러 문장과 문단으로 '책임'이란 한 단어를 짜임새 있게 풀어쓴 것 같았다. 삶에 질문하기보다는 삶에 답하려 했던 태도 역시 자신의 삶에 묵묵히 책임지려는 모습이었으며 끝내 친구를 지켜주지 못해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빅터 프랭클 박사가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을 다루며 발견한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지침은 바로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로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 책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담배피는어린왕자님 독후감 마지막 글에 쓰인 문장을 보고 나는 이 책을 머리로만 읽는 게 아니라 몸에 체화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담배피는어린왕자님은 이 책을 "읽고" 미루던 친구의 묘를 방문했다.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속에 담아뒀던 상자 하나를 열어 마주 보게 하는 것. 그리고 나아가는 힘을 주는 것.
박공주님의 생각나눔에서 그들이 제일 힘껏 저항할 수 있던 일이 바로 '살아남기'라고 언급한 바 있다. 실제로 책에선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항상 면도를 하고 두 뺨을 쉴새 없이 문질러 혈색을 돋게 하는 등 살아남기 위한 팁을 서로 알려준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이 철저히 박탈당한 곳에서 남은 것은 오로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부당한 대우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그 상황을 묵묵히 감내한 이유는 살아남기 위함이었다.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인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들은 삶을 내려놓거나 포기한 것이다.
비록 비극적인 상황, 수동적인 태도, 부당한 대우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존 앞의 우정, 죽음 앞의 명예, 고통 속의 희망, 생명줄을 놓지 않는 책임들이 그 곳에 남아있었다. 환경으로 인해 행동은 지배당했으나 정신만큼은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처절한 투쟁이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에게 바라는 점은 고통을 피하지도 움켜쥐지도 않은 채 그대로 껴안아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도록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담배피는어린왕자 님의 독후감에 영감받아 인용함*
http://blog.yes24.com/document/11694106